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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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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4주일 다해 -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5-05-12 13:49   조회: 501회

본문

부활 제4주일 다해 -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이들이다. 따라서 예수님과의 관계가 신앙의 본질을 이룬다. 이 관계가 올바르면 합당한 결실을 맺고, 그렇지 않은 신앙은 결실을 맺지 못하는 헛수고가 된다. 착한 목자 주일인 오늘, 예수님은 당신을 착한 목자로,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양으로 비유하시며, 그 관계를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라는 말씀으로 일러주신다.

 

주님과의 관계의 핵심은 주님이 우리를 아신다는 점이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사실에 관한 정보를 가졌다는 뜻을 넘어서서 '내적으로 받아들인다'라는 의미다. 주님이 나를 아신다는 말씀은 나의 상태가 어떻든 주님은 나를 받아들이신다는 말씀이다. 그렇게 나를 알고 받아들이는 주님의 목소리를 나도 알아듣고 따를 때, 주님과 나는 하나가 된다.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되면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이를 두고 예수님은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고 이르신다.

 

왜 우리를 아실까? 당신께 우리가 귀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귀한지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루카 12,7)라고 이르신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주님은 다 아신다(마태 6,8 참조). 언제부터 주님이 나를 아실까? 시편은 "정녕 당신께서는 제 속을 만드시고 제 어머니 뱃속에서 저를 엮으셨습니다."(139, 13)라고 고백한다. 자기 자신을 모른 채 되는대로 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나보다 더 잘 나를 아시는 주님을 따름이 생명을 누리는 길이다. 그러기에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는 이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예수님은 선언하신다.

 

우리를 아시는 주님은 우리를 부르신다. 이를 성소라고 한다. 그 부르심이 우리를 우리 자신이 되게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익명의 생물에 불과하지만, 이름을 불러줄 때 꽃이 되고 잊혀지지 않는 의미가 되듯,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가 그분의 부르심을 들으면, 불러 주신 주님과 부름받은 우리는 새로운 관계에 들어간다. 주님이 내 이름을 부르심으로 이제 나로 하여금 꽃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 결코 잊혀지지 않는 존재, 곧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참으로 놀라운 소식이 복음이다.

 

주님은 왜 우리 이름을 부르실까? 우리 각자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존엄성을 지닌 고유한 자신이 되라고 이름을 부르신다. 마르틴 부버는 하느님께서는 죽음 다음 우리에게 왜 아브라함처럼 살지 못하였느냐, 왜 모세처럼 살지 못하였느냐고 물으시지 않는다. 너답게 살았느냐고 물으신다라고 이야기한다. 주님이 불러주시는 이름대로 각자의 소명을 사는 것이 곧 성소다.

 

나를 부르시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먼저 그분의 음성을 알아들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라고 이르신다. 성경에서 "듣는다"는 것은 청각적 인식을 넘어서서 주의 깊게 듣고, 마음속에 간직하는 자세를 말한다.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긴"(루카 2, 19) 마리아가 그 대표적인 예다. 더 나아가 '듣는 것''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다. 우리를 부르신 목소리의 주인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말씀에 담긴 뜻이다. 그리하여 '들음''따름'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기 위해, 주님의 말씀에 마음을 열고 따르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세상은 온갖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이 소음에 파묻히면 목자의 부르심을 알아듣기 힘들다. 하느님을 체험한 영적 스승들은 한결같이 하느님께서 침묵 가운데 말씀하신다고 증언한다. 마더 테레사는 "하느님께서는 마음의 침묵 안에서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는 영혼은 깊이 침묵하는 영혼입니다. 우리 자신이 내적, 외적 침묵을 실천하지 않고서는 감히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침묵은 모든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합니다. 바로 거기. 침묵 속에서만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대의 마음이 다른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그대는 하느님의 그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침묵 속에 들으십시오."라고 일러준다.

 

세상 소음 한복판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소음에서 벗어나 고요한 시간과 공간, 즉 침묵이 필요하다.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각종 소음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내면에서 올라오는 마음의 소리에 일일이 반응하여 걱정하고 화를 내고 두려워하면 주님의 음성을 듣기 어렵다. 자기 밖에 들리는 소음에서도 해방되어야 한다. 세상 소문과 해결책도 없는 걱정거리에 마음이 흔들리는 상태에서 주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는다. 자기 안과 밖의 소음에서 벗어난 침묵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도록 우리를 이끈다.

 

주님은 우리를 아시는 착한 목자이고 우리는 그분의 음성들 듣고 따르는 양이다. 그 관계가 신앙의 본질이다. 신앙이 자라지 못하는 이들은 대개 자신의 사고방식과 자신이 지키려는 가치를 신앙생활의 기준으로 심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기준에 들어오지 않는 말씀은 못 들은 채 외면한다. 이는 자신이 양이 아니라 목자로 살겠다는 태도다. 자신이 목자 노릇을 하게 되면 주님이 필요 없기에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영원한 생명으로의 초대를 놓쳐버린다.

 

착한 목자 주일인 오늘, 주님께서는 목자의 부르심을 알아듣고 따르는 양이 되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내면의 걱정과 외부의 소음에서 벗어나 침묵 가운데 주님 앞에 머무르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부르신다. 나를 다 아시고 부르시며 모두 받아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를 때, 둘째 독서에서 들었듯, 주님께서는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묵시 7,17)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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