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1주일 다해
본문
연중 제31주일 다해 -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오늘 복음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감동적으로 전한다. 자케오가 누구던가? 키가 작아 언제나 남의 뒷전에 머물 수밖에 없는 신체적 열등감 가득한 인간이었다. 식민지 제국의 하수인 세리로 동포를 착취하여 손가락질 받던 윤리적 열등감 가득한 인간이었다. 어쩌면 이러한 열등감을 넘어서기 위해, 남보다 잘 먹고 잘 살려고 열심히 살면서 돈을 모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진정한 기쁨이나 살아있음의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오히려 사람답게 사는 길에 대한 아쉬움, 진정한 행복에 대한 목마름, 인생의 진리를 발견하려는 갈망이 커갈 뿐이었다.
그러던 중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었다. 자케오는 ‘혹시 모르지, 그분이 견딜 수 없는 이 목마름을 채워 주실지. 그런데 내 주제에 부끄러워 어찌 그분 앞에 나서지? 남의 뒷전에서는 작은 키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남들 앞에는 부끄러워 나설 수 없고 …… 예수 만난다고 내 인생 달라질 게 있겠나? 포기할까? 아니다. 이 갈증, 이 공허감을 넘어설 수 있다면 무슨 짓을 못하랴. 가자. 나무 위에서 먼발치에서라도 그분을 보자.’ 이런 심정으로 나무에 올랐다. 그 자케오를 예수님이 올려다보신다.
‘아! 그분의 눈길. 그 눈길에 마주한 순간 숨이 멎는 듯하였다. 자애와 연민 가득한 눈빛. 나를 한 인간으로 받아주는 눈길, 삶에서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눈길. 부끄러운 모든 것을 포함하여 내 삶 전체가 받아들여지는 눈길이다.’
주님의 눈길에 마주한 충격에 빠진 자케오에게 예수님이 이르신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나무에서 얼른 내려오라는 말씀은 자신의 본래 삶에서 벗어난 곳에서 돌아와 본래 모습을 찾으라는 말씀으로 들렸다.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이신 분이 내 인생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말씀을 건네신다. 게다가 오늘 내 집에 머무르시겠단다. 내 존재를 받아주신 그분께서 내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나를 아시고 받아주시고 사랑하시는 분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 것보다 더 감사하고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내 삶이 제 모습을 찾고 주님께서 현존하신다는 데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내 안에 당신께서 현존하시니 이제까지 추구해온 재물의 세계는 가볍게 내려놓게 되었다. 재물에서 주님의 현존으로 중심이 바뀐 것이다. 그때 그분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라고 이르신다. 자케오는 더 할 말이 없다. 다만 그분을 보는 눈길이 된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윤리 도덕이 아니라 사랑의 현존이었다.
주어진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고도 허전할 때가 있다. 내 삶에 기쁨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왜 기쁨이 없을까? 그 답은 내가 언제 기뻤던가 하는 성찰에 있다. 참으로 친한 친구,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기쁘다. 역으로, 기쁨이 없는 이유는 참된 만남이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기쁘기 위해서는 진정한 만남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Mantin Buber는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라고 갈파했다.
우리 모두 자케오처럼 형태는 다르지만 열등감을 지니고 산다. 먹고살기 위해 거짓말을 할 때도 있었고, 남들에게 드러내기 부끄러운 일로 나무 뒤에 숨고 싶고, 그럴수록 사람대접받고 싶고, 감사와 기쁨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갈망은 커진다. 그래서 자케오가 나무 위에 올라갔듯 여러 형태로 갈망을 표현한다. 그 갈망이 진정한 만남으로 이어지는 때는 바로 예수님의 눈길을 마주할 때다. 주님께서는 나를 보시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말씀을 건네시고, 내게 머물겠다고 다가오신다. 그 만남에서 인생이 새로워진다.
자케오 이야기는 주님과의 만남뿐 아니라 이웃 사람들과도 그렇게 만나라는 초대로 들린다. 키 작은 사람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세리라고 경멸하지 말고, 부자라고 경원시하지 말고 가난하다고 외면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나와 다른 타인,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는 이웃은 내가 모르는 어떤 사정이 있어서 그럴지 모른다. 자케오를 받아주던 예수님처럼 나와 다른 이웃도 받아주라는 말씀이다. 그 만남이 세상을 살아갈 이유인 참 기쁨을 준다. 그때 우리 가운데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순교자 황 일광 알렉시오(1756-1802)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나는 백정으로 태어나 이제껏 사람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천주교인이 됨으로써 어떤 학문이나 이치가 아닌 신앙의 삶을 통해 천주교가 참됨을 깨우치게 되었다. 나에게는 천국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아직 오르지 못한, 곧 가게 될 이승 너머의 곳이고 또 하나는 지금 이 생활이다. 양반인 천주교 형제들은 금수와 같이 취급되는 나를 형제라 부르며 나를 친형제처럼 사랑으로 대해주었다. 우린 하느님 아버지와 성모 어머니께 한마음으로 묵주기도를 드렸고 함께 고생했다.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자케오처럼 예수님과의 만남을 체험한 신앙 선조들은, 예수님처럼 모두를 받아주는 새로운 세상, 살맛 나는 기쁨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나를 받아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공동체, 서로를 소중하게 받아주는 공동체가 우리가 이루어야 할 교회의 참 모습이다. 그곳이 하느님의 나라 아닐까?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제1독서, 지혜 11, 26)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