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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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2주일 가해 -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지난 주일, 주님이 다시 오심을 깨어 기다리라는 말씀을 들으며 대림절을 시작하였다. 오늘은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듣는다. 복음에서 요한 세례자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외친다. 회개를 하되 속히, 서둘러 하라는 말씀이 이어진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있으니 지체할 시간이 없다.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질 것”이라는 경고가 뒤따른다. 이 절박한 호소 앞에 회개의 본질이 무엇이고 왜 서둘러 해야 하는지 성경 말씀을 통해 살펴보자.
먼저 성경에서 회개(metanoia)란 단어는 단순한 반성이나 뉘우침이 아니라 기존의 정신(nous), 혹은 길(noia)을 바꾸는(meta) 것을 의미한다. 즉 잘못의 후회와 반성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추운 겨울날 한밤중에 어떤 사람이 서울을 가려고 기차를 탔다. 깜빡 졸다가 보니 기차는 강릉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잘못 탄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았으면 빨리 기차를 바꿔 타야 한다. 그것이 회개다. 즉 강릉으로 향하던 방향을 서울 쪽으로 바꾸는 것처럼, 편하고 유리한 것을 쫓던 자기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회개다. 복음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라고 이어진다. 방향을 바뀌야 결실을 맺는다.
그런데 기차 안은 따뜻하고, 편안하고, 잠이 쏟아졌다. 기차를 갈아타려면 추운데 내려서 오랜 시간 기다리는 것이 귀찮아 그냥 앉아있다면 변화도 없고 열매를 맺지도 못한다. 후회와 반성만 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회개는 춥고 힘든 여정이 따르는 변화다. 변화가 번거로워 그냥 후회만 한다면 점점 더 목적지에서 멀어진다.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발견한 순간 바로 바꿀수록 변화의 결실을 맺기가 수월하다. 회개는 빠를수록 좋기에 절박하게 행해야 한다. 그러기에 세례자 요한은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는 격한 표현을 쓰며 지금 당장 결단을 내리라고 촉구하였다.
이렇게 결단을 내려 중심을 바꾸는 모습을 바오로 사도는 구체적으로 타인을 받아들이는 삶임을 전한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내가 편한 것을 내 방식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입장에서 받아들임이 회개의 실천이라는 말씀이다.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존중해야 한다. 존중이 없으면 배려나 소통도 자기만족의 완고함이 되고, 사랑도 비뚤어진 욕심이 되어 삶은 상처와 허무만이 남는다. 한 층에서 다른 층으로 올라가듯 서로 존중함을 통해 삶은 더 넓은 지평으로 나아간다. 진정한 받아들임으로 못 보던 것을 살피고 성숙한 존재가 된다. 이때 세상이 달라진다. 그것이 회개의 열매다. 그래서 존중에 바탕을 둔 받아들임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바오로는 역설한다.
육십이 넘은 노부부가 성격 차이를 이유로 이혼을 했다. 노부부는 이혼한 날 마지막 저녁 식사를 했다. 주문한 음식은 통닭이었다. 통닭이 도착하자 할아버지는 자기가 좋아하는 날개를 할머니에게 권했다. 순간, 할머니가 화를 내며 말했다. “지난 삼십 년 동안 당신은 늘 그래왔어. 항상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더니 이혼하는 날까지도 그렇군.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한 번이나 물어본 적이 있어? 난 다리를 좋아한단 말이야. 당신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이야.”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했다. “날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위야. 나는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삼십 년 동안 간 꾹 참고 항상 당신에게 먼저 건네줬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이혼하는 날까지.” 노부부는 서로 씩씩대며 각자의 집으로 가버렸다. 집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정말 한 번도 아내에게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어본 적이 없었구나.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주면 좋아하겠거니 생각했지. 아무래도 마음을 풀어주어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에 찍힌 번호를 보고 화가 덜 풀렸던 할머니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계속 전화가 걸려오자 배터리를 빼 버렸다. 다음날 아침, 할머니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지난 삼십 년 동안 남편이 날개를 좋아하는 줄 몰랐네. 자기가 좋아하는 부위를 나에게 먼저 떼어내 건넸는데, 그 마음은 모르고 화만 내었으니 얼마나 섭섭했을까? 섭섭했던 마음이나 풀어주어야겠다.” 할아버지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한참 후 낯선 전화가 걸려왔다. “전 남편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 집으로 달려간 할머니는 핸드폰을 꼭 잡고 죽어있는 남편을 보았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특성은 절박성이다(G. 로핑크). 주님이 오시니 회개하라고, 지금 당장 중심을 바꾸라고 촉구하는 이유는 지금이 아니면 늦기 때문이다. 그 회개는 본능대로 살고 습성대로 살던 태도를 버리는 데서 출발한다. 말하고 싶은 대로 다 말하며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남이야 상처를 받건 말건, 사실이건 거짓이건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여 자기 좋을 대로 말하고 듣기 좋은 대로 듣는다. 정말 주님을 모시고자 한다면 이제 입을 다물고 진실 앞에 귀를 열어야 한다. 자신만 옮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상대방 입장을 헤아리며 생각하고 말하는 발상의 전환, 그저 겉만 보고 쉽게 판단하는 경망된 태도에서 벗어나 속에 든 어려움과 진실을 살피려는 신중함으로의 전환, 내 입장에서 주장하고 설득하려는 태도에서 하느님 입장에서 다시 보고 기도하는 전환이 중심을 바꾸는 회개다.
입장을 바꿀 때, 회개할 때 시작되는 새 세상을 이사야 예언서는 아름답게 표현한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함께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한마디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는 말씀이다. 그 세상은 늑대와 양, 송아지와 사자가 함께 사는 공존의 세상이다. 부자와 가난한 이, 배운 자와 못 배운 사람, 젊은이와 노인이, 모두가 함께 존중하며 살 수 있는 길이 여기서 열린다. 그것이 날이 갈수록 서로 자기 생각만 하며 양극화의 갈등 속에 공존이 위협받고 있는 지금 여기서 회개해야 할, 절박하게 길을 바꾸어야 할 이유이다. 내가 소중한 만큼 내가 미워한 사람도 소중하고, 도저히 얼굴도 볼 수 없던 사람과 함께 이야기하고, 죽도록 미운 사람과 기쁘게 식사를 나눌 길이 회개로 열린다.
예수님은 그렇게 세상을 바꾸러 오신다. 이제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적에서 형제로, 단절에서 소통으로, 거부에서 수용으로, 지배에서 존중으로, 나에서 너로, 세상에서 하느님으로 중심을 바꾸는 결단을 내리자. 그때 주님이 오시고 새 세상이 열린다.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