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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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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2-11-30 09:45   조회: 3,502회

본문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따르다"라는 동사는 유다교에서 제자들이 스승과 맺는 사제 관계를 표현할 때 사용했는데,

마태오는 복음에서 이 동사의 의미를 유다교와 달리 사용한다.

유다교에서는 제자가 스승을 선택했지만 복음에서는 스승이 주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여 부르신다.

유다교에서 제자는 집에서 학교로 출퇴근하며 스승으로부터 단순히 율법을 공부하였지만,

복음에서 제자들은 스승과 함께 살며 말씀을 배우고 스승인 주님의 협조자가 되고(10, 1-27참조),

더 나아가 스승이 가신 길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16,24)을 의미한다.

주님의 부르심을 들은 제자들의 태도에서 주님을 따르는 길을 본다.

부르심을 듣고 제자들은 "곧바로" 반응을 보인다.

부르심이 결실을 맺는 응답은 곧바로, 달리 말해 "지금 여기서" 바로 이루어지는 응답이어야 한다.

지금 여기서 응답하지 않는다면 부르심은 내 삶에 결실을 맺지 못한 채 흘러가고 만다.

부르심을 들은 이들은 "그물을 버리고",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떠난다.

그물과 배는 생계수단을, 아버지는 존재의 근거를 상징하는데 이 모두를 버리고 주님을 따른다.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버리고, 그다음은 무엇까지, 어디까지 버릴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 24).

그물과 배와 아버지와 자신을 버리고 "따름"은 그들 앞에 어떤 존재가 있음을 전제로 한다.

제자들 앞에 서신 분, 앞장서서 인간을 부르시고 움직이시는 분은 누구실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 5)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을 만나고 그 말씀을 들을 때 모두를 버리고 따르게 된다.

이처럼 " 따름(sequela)"은 단순히 주님의 특정한 태도를 본받는 "흉내 내기(imitatio)"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거기서 죽으신 주님의 운명을 내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F. 마르티네스 디에스).

그렇게 따라나서는 형태가 흥미롭게도 둘씩 짝지어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 "요한과 야고버".

제자직이 홀로 가는 길이 아니라 우정에 찬 "관계"임을 암시하는 말씀으로 들린다.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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