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1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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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1주일 가해 - 너희는 준비하고 깨어 있어라.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되었다. 오늘 듣는 말씀은 대림의 의미가 무엇이고 우리가 어떻게 이 시기를 보낼 것인지 일러준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셨다.”고 고백한다. 예수께서 2천 년 전 나자렛에서 태어나신 것이 주님의 첫 번째 오심이었다. 이 첫 번째 오심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 안에 직접 개입하셨던 과거의 사건이다. 이어서 사도신경에서 그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부 오른 편에 앉으셨고,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고백하는 주님의 다시 오심은 세상 끝 날에 이루어질 미래의 약속이다.
첫 번째 오심은 과거의 역사이고 다시 오심은 미래의 약속이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 대림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중간 시기이다. 이 시기는 신학적으로 "성령의 시기"라고 부른다. 즉, 성령께서 과거나 미래가 아닌 오늘 여기서 예수님을 만나게 이끄시는 시기이다. 매일의 일상생활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성령을 통해 알아 뵙고 만나는 때라는 말씀이다. 일상의 이 만남으로 임마누엘의 시대,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의 시대’가 실현된다.
나날의 삶에서 주님의 오심을 어떻게 알아채고 맞이할 수 있을까? 복음에서 주님은 "너희는 준비하고 깨어 있어라."라고 거듭 이르신다. 깨어 있어야 주님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깨어 있음과 그렇지 않음의 차이는 분명하다. 깨어 있음은 내가 누구이고, 여기는 어디이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식하는 삶이다. 깨어 있지 못하는 상태는 마치 잠든 사람처럼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왜 하는지 잊어버린 채, 말을 하면서도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른다. 이러한 현대인의 상태를 두고 R. May는 “우리 모두는 주소는 가지고 있지만 거기에 살고 있지는 않다”고 표현한다. 성당에서는 집 생각, 집에서는 직장 생각, 가족과 함께 있으면서 친구 생각, 친구를 만나면 가족 생각을 하는 경우를 비유한 말이다.
그렇다면 깨어 있을 방도는 단순하다. 내가 누구인지, 지금 어디 있는지, 왜 이 일을 하는지 물어보면 된다. 한 랍비가 밤늦도록 연구에 몰두하다가 귀가하는 길이었다. 순찰을 돌던 야경꾼이 보니 랍비가 자기 집을 지나쳐 다른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친절한 야경꾼은 "선생님, 지금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자기 집도 잊어버린 채 길을 가던 랍비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섬광과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 랍비는 야경꾼에게, 자기를 만나기만 하면 "지금 어디로 가십니까?"라는 질문을 계속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고 한다. (M. Buber, 인간의 길) "지금 어디로 가는가?" 하는 질문이 깨어 있게 하고, 인생의 진리를 깨닫게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구인가? 죽을 몸, 땅으로 돌아가 썩어서 끝날 인생이었는데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목숨을 내어주시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존재이다. 하느님의 그러한 사랑을 받아들여 우리도 서로 사랑할 때 하느님 안에 살게 된다.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 내 삶의 한가운데로 오신다. 지금 그렇게 깨어 있는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면 그 물음이 우리를 깨어 있게 할 것이다. 자신에게 물어보고 혹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면 얼른 제 길로 돌아서는 회심으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렇게 깨어 있을 때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하느님 자녀로서의 품위와, 사랑으로 사는 인간의 행복을 누린다.
"사람에겐 깨어 있는 본성이 있으니 깨어 있으면 어둡지 않으나 깨어 있지 못한 자는 물욕에 얽히고 가려진다. 그러나 거울에 먼지가 낀 것과 같아 털면 다시 맑아질 것이니 깨어서 존재하면 본성이 둥글게 드러나 크고 광명한 거울과 같아질 것이다. 밖으로는 망령됨과 사특함을 제거하고 안으로는 투명하고 광명함을 보존한다.”(고산 허균)
복음에서 예수님은 깨어 있으라는 말씀에 이어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라고 이르신다. 무슨 뜻일까? 밭 갈고 맷돌질하는 일상의 행위는 누가 하든 같은 일이지만 내적 마음 자세에 따라 운명이 갈라진다는 의미로 들린다. 한 명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하는지 알아 채지 못하고 그저 일만 하지만, 다른 한 명은 자신이 누구이고 왜 하는지 알고 하는 깨어 있는 사람이다. 그 차이가 구원의 기준이 된다.
가정이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도를 하든, 사회생활을 하든, 가정에서 주어진 역할을 하든 지금 여기가 어디이고, 무엇을 할 때이고 왜 하는지 알고 행할 때와, 생각 없이 깨어 있지 못한 채 행할 때는 그 결과가 전혀 다르다. 깨어서 행하는 신앙생활이나 가정에서의 역할은 주님을 만나는 은총의 순간이 된다. 왜 하는지 모르고 그저 습관적으로 행할 때는 이런저런 활동이 공연한 헛수고로 피곤하기만 하다. 주님이 다시 오심을 깨어 기다리라는 오늘 말씀은 일상의 노고를 권태와 무기력으로 허망하게 흘려보내지 말고, 은총과 격려가 주어지는 선물로 받아들이라는 초대, 세상의 부조리를 넘어서게 하는 잔치로 만들라는 초대가 담겨있다.
대림절을 시작하며 깨어 있으라고 둘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당부한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