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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한다.
(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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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2-12-24 15:25   조회: 3,246회

본문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 오늘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오늘 밤은 성경에 따르면 빛으로 가득 찬 밤이다. 첫 독서에서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라고 이사야는 예언한다, 아기 예수님이 바로 이 빛이시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라는 첫 독서의 예언이 복음에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천사의 아룀으로 성취되었다. 사도 바오로는 이를 두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라고 전한다. 복음 말씀을 통해 이 빛에, 구원의 은총에 더 가까이 다가가보자.

​​마리아는 "첫아들을 낳았다"라고 복음은 전한다. 성경에서 첫아들이란 앞으로 이어질 아들들의 맏이라는 뜻이 아니라, 본래 하느님께 속한 존재를 지칭한다. "첫아들은 모두 나에게 봉헌하여라"(탈출 13, 1-2); "너희 자식들 가운데 맏아들은 모두 대속해야 한다"(13,13)라는 계명에서 드러나듯 첫아들은 하느님께 속하기에 봉헌과 대속을 해야 했다. 마리아가 첫아들을 낳았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느님께 속한 맏이라는 표현이다. 같은 맥락에서 로마서에서 바오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이"(8, 29)라고 부른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콜로 1, 18)라는 언급에서 드러나듯, 새 창조의 시작이며 마침이신 분, 우주의 참된 맏이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셨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다.

첫아들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태어나신다. 마구간은 출산에 적합하지 않은 황량한 장소다(베들레헴 주변에서는 바위 동굴을 마구간으로 사용하였다). 거기서 예수님을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동방 전례의 이콘은 아기 예수를 감싸고 있는 포대기를 시신을 염하는 상징으로 그린다. 예수님을 누인 구유는 동물의 여물을 담는 곳이다. 그곳에 하늘에서 내려온 빵, 인간의 참된 양식이 누워 계신다(성 아우구스티노). 빵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실 분이 이미 암시되고 있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강생의 첫 증언자는 목자들이었다. 목자들은 따뜻한 성읍 안이 아니라 성읍 밖 추운 들판에서 밤을 새우던 이들이다. 집 안에 있는 중심부 사람들이 아니라 집 밖의 주변부 변두리 사람들이 하느님 사랑의 첫째 자리를 차지한다. 후일 선포될 가난한 이들의 행복이 예시된다. ​그리고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는 찬미가 울려 퍼진다. 여기서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란 누구일까? 예수님의 세례 때 들려온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 22)라는 말씀에서 밝혀지듯,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이다. 더 나아가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아들과 같은 자세를 지닌 사람,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그들이다. (J. 라칭거)

​세상을 돌아보자. 가정이든 사회든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한숨이 끊이지 않는다. 화난 얼굴로 씩씩거리며 어둡고 추운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다. 그러다가 뒤돌아보는 자신의 모습은 허탈하기 그지없다. 그런 우리에게 나타난 "하느님의 은총"은 아무 힘 없이 말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다. 가난하게 오신 하느님이다. 하느님의 가난하심이 하느님의 사랑법이자 성탄의 신비다. 가장 작고 힘없는 모습으로 오심으로써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의 빛이 되시고, 버려진 마구간에 핏덩어리로 오심으로써 막다른 골목에, 어둠의 심연에 빠진 우리를 비추신다. 내세울 것 없이 부끄러운 우리, 변두리에서 서성이며 한숨 쉬는 우리, 드릴 것 없어 빈손 비비는 우리, 사는 게 힘들고 앞길이 어두운 우리, 이렇게 무능하고 가난한 우리에게 당신은 연약함과 가난함으로 오셔서 함께 하신다. 그러기에 주님의 오심은 그 자체로 사랑이다. 그렇다. "하느님의 가난하심, 그것은 내게 그분의 전능하심보다 더 큰 위안을 주십니다. 하느님의 가난하심은 내게 그분의 전지하심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내게 그분의 엄위하심보다 더 가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가난, 바로 여기에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가 있습니다." (Carlo Carretto)

​이 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다. 우리 상태가 어떻든 간에 우리는 사랑을 받았다. 이것이 성탄을 기뻐해야 할 이유이다. 그분은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부족하기에 더 사랑하신다. 안팎의 상황이 출구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빛으로, 참 기쁨으로, 새로운 삶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이블린 언더힐은 성탄의 신비를 "인간적인 것이 거룩해질 수 있게 되었다."라고 갈파한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본성이다. 태어나서 먹고 자고, 만나고 헤어지고, 기뻐서 노래하고 슬퍼서 울고,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인생의 모든 것이 하느님처럼 거룩해지는 길이 열렸다. 하느님이 세상 구석구석 모든 곳에 살아 계시게 된 사건이 성탄이기에 모든 사람들이 캐럴을 듣고 추리를 장식하며 기뻐한다. 우리는 이를 강생의 신비라고 부른다. 

​아기 예수를 보자. 새로운 계약의 궤인 구유에, 커룹(대천사) 대신 온 세상 사람들을 상징하는 소와 나귀의 경배를 받으며,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첫아들로 오신 분. 가난과 추위에도 성문 밖 변두리에 깨어있던 이들에게 평화를 주시는 분을 보자.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계신 "우리를 위해 태어나신 한 아기"를 경배하자. 추위에 한밤중에 약하고 가난하게 나신 분, 우리와 같아지신 아기 예수께 ​"당신은 우리 주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어둠을 없애고자 어둠 속에 오신 빛, 우리의 약함을 지고자 연약하게 오신 분, 당신은 우리 주 하느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면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르실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벌거벗은 채 태어난 것은 네가 자신을 포기해야 하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내가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네가 나를 유일한 부로 여길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내가 구유에 태어난 것은 네가 모든 환경이 거룩하다는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약하게 태어난 것은 네가 나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가 사랑으로 태어난 것은 네가 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가 밤에 태어난 것은 네가 어떤 상황에서도 빛을 비추는 나를 믿게 하기 위해서.

내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네가 '하느님'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내가 박해 중에 태어난 것은 네가 어려움을 잘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내가 단순하게 태어난 것은 네가 복잡한 것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내 생명 안에 태어난 것은 너희 모두를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익명, 성탄 묵상)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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