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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한다.
(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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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4주일 가해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2-12-19 10:41   조회: 3,327회

본문


대림 제4주일 가해 -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대림절 마지막 주일, 첫 독서에서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전해지고, 복음에서 그 예언이 마리아와 요셉을 통해 예수님에게서 드디어 성취됨을 전한다. 기원전 6세기의 예언이 기원 원년에 성취된 이 사건이 2000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지닐까?

​먼저 첫 독서의 임마누엘 예언의 배경을 살펴보자. 이 시기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730년 전으로써, 주변의 열강들이 유다 왕국을 침공하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아하즈 왕은 강대국 아시리아와 군사동맹을 맺으려 한다. 이때 예언자 이사야가 왕에게 '왜 나라 운명을 꼭 정치, 군사, 외교적으로만 해결하려 하는가? 먼저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자'라고 충언한다. 그러나 왕은 ‘어떻게 하느님을 시험할 수 있는가?’ 하며 거절한다. 겸손한 척하지만 실상은 하느님의 능력을 믿지 못해서 핑계를 댄 것이다. 또 하느님의 활약으로 자신의 권력이 약화될까 두려워서, 그냥 하느님을 성전 안에 고이 모셔만 두려는 교만이 바탕에 깔려있다. 이에 "젊은 여인(동정녀)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라는 예언이 내린다. 처녀가 아이를 낳는 일이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느님께는 가능하듯, 어려움을 겪는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이 직접 들어오시어 불가능한 상황을 해결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우리 삶을 이끄시는 주님으로 모시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아하즈 왕처럼 '하느님이 어떻게 내 일상 속에 들어오시겠는가? 먹고 자고, 일하고 지치고, 늙고 병들고, 기쁘고 속상한 일상에 어떻게 하느님이 들어오시겠는가?' 하며 겸손을 가장하여 하느님의 개입을 불신한다. 그러한 태도의 이면에는 하느님의 개입이 부담스러워서 '내 삶에 벌어지는 일들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하느님은 내 인생에 간섭하시지 말고 내가 필요할 때만 오시면 됩니다. 내가 부를 때까지 그냥 성전 안에서 찬미를 받으시며 가만히 머물러 계십시오'하는 교만이 숨겨있지 않을까?

​불신과 교만을 넘어서서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복음의 요셉에게서 그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요셉은 함께 잔 적이 없는 약혼녀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자 파혼하려고 마음먹는다. 직접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요셉의 심정은 참으로 난감했을 것이다. 그런데 꿈에 천사가 나타나 그 임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그 아기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이 이뤄질 것이라고 전한다. 꿈속에서 들은 뜬금없는 말씀,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요셉이 받아들여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다. 이에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는 예언이 성취된다.

​받아들임이 관건이다. 꿈속의 지시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자 실제의 역사 속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된다. ​우리 삶에서도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든 일들이 종종 발생한다, 어떻게 이러한 일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E. 퀴블러로스는 인생에서 참으로 배워야 할 것을 이렇게 일러준다. “삶에서 닥치는 어려움은 나쁜 것도 아니고, 그 이유를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삶은 우리에게 겸허함을 요구한다. 삶은 신비이며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싸움을 멈추는 것, 줄다리기 계임을 멈추는 것, 줄을 내려놓는 것, 우리의 방식을 내려놓는 것이다. 불가능한 상황을 통제하려 들지 말고, 내가 옳고 저 사람은 틀렸으니까 고쳐주겠다는 생각까지 내려놓는 것, 그리고 ‘당신의 뜻대로’라고 말하는 것이다.”

복음의 요셉과 마리아가 보여준 받아들임의 길이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많은 이들이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목소리 높이고 줄다리기를 하며 싸워보지만 결국 헛되이 힘만 빠진다. 줄을 내려놓고 ‘당신의 뜻대로’라고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하느님의 말씀도 받아들이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맞아 자존심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하며 고집부리는 이들도 있지만 결국 자신을 꽁꽁 묶어놓는 집착만 남는다. 자존심과 고집을 내려놓고 있는 대로 현실을 받아들이며 그 속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때 진정한 자유가 다가온다. 내가 옳고 상대방이 틀리다며 이를 가르치고 바로잡으려고 언제나 큰소리치는 이들도 있는데,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옳은 것이더라도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저 울화통 터지는 싸움만 남을 뿐이다. 때가 되면 알겠지 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상대방을 받아들이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진정한 기도를 올리는 것이 지혜다.

​상대방뿐 아니라 힘들고 냉혹한 현실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 자신도 받아들이자. 이러한 받아들임은 "체념하는 것이나 방종, 혹은 수동적인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세상과 자신에게 깨어 있고, 하느님과 이웃에게 열려 있는 가운데 자신이 변화되는 신비다."(타라 브랙, 받아들임)

27년 동안 감옥에서 탄압과 외로움과 불안을 경험했던 넬슨 만델라는 분노나 체념에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자기를 박해한 이들까지 받아들인다. 그 결과 자신이 변화되어 평화와 정의를 위해 활동하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었다. “인간에 관한 신기한 역설은 내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내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칼 로저스)

​요셉과 마리아는 하느님의 섭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임마누엘이 이루어졌다. 우리 삶에 하느님의 이끄심을 받아들일 때 나를 위해 태어나시는 아기 예수를 만난다. 아울러 새로이 태어나는 자신의 모습도 발견하게 된다. 이때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신비가 우리에게 실현될 것이다.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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