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일 가해 –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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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주일 가해 –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신앙의 근본이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우리가 예수님께 누구인지 그 관계가 신앙의 본질을 이룬다. 오늘 들은 말씀은 이 물음을 깊이 성찰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복음에서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선언한다. 성경에서 어린양은 구원과 관련하여 등장한다. 탈출기에 의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해방되던 날에 어린양 한 마리씩을 잡아 문설주에 그 피를 발랐다. 그날 밤 죽음의 사신이 이집트를 덮쳐 모든 집의 맏자식들은 다 죽였으나,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가 묻은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거르고 지나갔다(파스카, 과월). 이 과월절 사건으로 고집 센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방령을 내리게 되었다.
이처럼 어린양은 이스라엘의 맏자식을 살리고자 대신 죽은 속죄제물이었다. 그 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린양을 잡으며 이를 기념하며 해마다 파스카 축제를 지냈고, 성전에서는 매일 어린양의 봉헌 제사를 행하였다(탈출 29, 38-46참조). 후일 나라가 망하여 유배를 당한 후에는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의 의미를 "고난받는 야훼의 종"(이사 53, 7)에서 찾으며, 미래에 오실 구원자를 고난받는 어린 양으로 간주하였다(아라메아어 talja는 '어린 양'이자 '종'의 두 가지 의미를 지녔다)
요한 세례자는 바로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한다. 여기서 사용하는 "없애다 airein"라는 단어는 본래 '자기의 어깨로 나르다, 짊어지다’라는 의미도 지닌다. 인간의 죄를 짊어진 예수님의 수난을 암시하는 구절이다. 그리고 "세상의 죄"라는 표현에서의 '죄'는 문법적으로 관사를 동반한 단수인 'e amartia'이다. 이때의 의미는 구체적인 개별 범죄가 아니라, 보편적인 죄로의 경향, 죄의 본성(뿌리)을 지칭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말씀에서 ‘죄’란 단순한 잘못을 뜻하지 않고, 잘못을 저지르는 근본 성향인 “죄성(罪性)"으로써 모든 종류의 죄를 통칭한다고 해석하였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함은 주님께서 죄의 근본 원인인 인간의 악한 본성을 당신 어깨 위에 짊어지고 그 죄성을 없애심으로써 죄악과 죽음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을 가져오셨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인간에게 예수님은 내 죄를 짊어지신 하느님의 어린양이셨다.
죄 많은 세상에서 죄로 얼룩진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 현실이다. 어떻게 세상의 죄, 내 안의 죄, 얽히고설켜서 계속 이어지는 이 어두운 죄를 씻을 수 있을까? 흔히 죄인과 선인의 구별과 죄인에 대한 단죄, 고발과 처벌로 죄를 없애려고 시도하지만 그로써 세상의 죄가 없어질까? 죄도 없어지지 않고 죄로 기우는 본성인 죄성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죄나 죄성을 없애신다. 앞서 살폈듯 '어린양'이란 사람들의 죄를 뒤집어쓰고 대신 죽는 속죄제물(탈출 12,1-28) 이자, 죄가 없으면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하는 '주님의 고통받는 종'의 표상(이사 52,13 - 53,12) 이었다. 이처럼 어린양은 죄를 지을 때마다 바치던 제물이었는데, 예수님이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요한은 선포한다. 구약에서 죄를 지을 때마다 속죄 제물로 바친 어린양이나 속죄양은 단 한 번의 예수님의 희생으로 모든 죄를 씻게 된 참된 어린양의 예표였다. 그 실재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예수님은 인간의 죄악을 모두 뒤집어쓰고 죄 사함의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죄와 고통과 어둠의 절정인 죽음을 받아들여 어린양이 되셨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길이었다.
요한 세례자는 이 어린양을 알아보고 우리에게도 "보라!"라고 외친다. 우리는 미사 중 어린양이신 성체를 모시기 앞서 하느님의 어린양을 세 번씩이나 부르고, 어린양을 보라는 말씀을 다시 듣는다. 우리 가운데 계신 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을 보라는 초대다. 그분 만이 "과녁을 빗나간 화살 amartia"같은 우리 죄를 없애시고,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신다.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어린양을 보고, 받아 모시고, 하나가 되어 어린양의 힘으로 어린양처럼 희생하고 사랑하라는 초대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누구일까? 바오로 사도는 둘째 독서에서 신앙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성도, 곧 성인으로 불림 받은 존재라는 선언이다. 첫 독서의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는 예언이, 복음의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어린양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가 되었다.
불자들은 “성불하소서” 하고 인사를 나눈다. 참 아름답고 거룩한 인사다. 개신교 형제들은 서로를 “성도”라고 부른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부합하는 호칭이다. 그런데 천주교 신자들은 ‘감히 내가 어떻게 성인이 될 것인가? 그저 지옥 불이나 면하면 되지.’하고 뒤로 물러나는 경우를 본다. 겸손을 가장하여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유혹이다. 하느님의 어린양이 목숨을 바쳐서 귀하게 만든 우리를 우리 스스로 천하게 여기는 것은 결코 하느님 뜻이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어린양"께서 구원하신 존재이다. 우리는 성인으로 불림 받은 존재이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라"는 말씀을 들은 존재들이다. 그것이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우리 신원의 뿌리이다.
비록 우리가 내세울 것 없고, 거룩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고, 죄도 많고, 우리 안에 본성으로 자리 잡은 죄성도 여전하지만, 하느님의 어린양은 세상의 죄와 우리의 나약함을 친히 당신 어깨에 메고 없애주셨다. 그 어린양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시며 어린양과 하나가 되고, 그래서 어린양처럼 타인을 위해 희생하려는 마음을 모아 성경 말씀이자 전례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자.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