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일 가해 -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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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7주일 가해 -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지난 주일 살인, 간음, 거짓말 등을 금지한 구약의 율법을 예수님이 새롭게 가르치신 말씀을 들었다. 그 핵심은 변화하라는 요청이었다. 율법의 문자에서 사랑의 정신으로, 인간의 능력에서 성령의 이끄심으로 변화하라는 요청이었다. 오늘 복음은 이제까지의 새로운 가르침의 결론을 이렇게 전한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용서도 힘든 현실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요청으로 들린다. 말씀의 뜻을 깨닫는 열쇠는 이 제안의 의도에 있다. 그 의도를 예수님은 이렇게 일러주신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원수를 사랑할 길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바탕을 둔다는 말씀이다. 인간은 본성상 원수를 미워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느님은 이러한 한계를 지닌 인간을 당신의 자녀로 변화시키심으로써, 그 한계를 넘어서게 하신다는 놀라운 말씀이다.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하느님처럼 사람을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다. 그러한 사랑으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라는 말씀이다. 이는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불가능한 명령이 아니라, 하느님 자녀로서의 인간성을 완성하라는 초대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현실에서 이 말씀을 실천하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누구나 절감한다. 그런데 이를 온전히 실천하신 분은 다름 아닌 예수님 자신이셨다. 수난을 받으실 때 오른뺨을 맞으면 왼 뺨을 내어 주셨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십자가 상에서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신 분, 참으로 원수를 사랑하신 분은 예수님 자신이셨다. 예수님은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셨을까? 누구든지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마르 8, 34) 따르라 하신 말씀에 비결이 담겨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신 분, 그렇게 원수를 사랑하신 분이 예수님이셨다.
자기를 버리는 일은 이기적인 작은 나(ego)를 중심으로 살지 말라는 의미다. 내 물건, 내 자존심, 내 경험, 내 가족이 '나'일까? Ego가 중심인 나는 진정한 나가 아니라 소유의 주체로서의 작은 나일뿐이다. 그 나를 버리고 하느님 아버지를 따를 때 본래 '나'로서 원수 사랑이 가능할 것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 나를 저주하고 나를 학대하는 자는 내 원수다. 그래서 미워하고 싸워서 이기려 하고 복수하려 든다. 나의 원수, 나의 적 등등 이 모든 생각은 '나(ego)'라는 기준이 바탕이다. 이기적 자아인 '나'가 중심에 있는 한 원수를 사랑할 수는 없다. 이 작은 '나'를 버리고, 하느님 자녀로서의 참 '나'를 찾을 때 자기 감옥에서 해방된다. 사도 바오로는 둘째 독서에서 이렇게 이르신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작은 나에 묶여 내 눈길을 '나'에게 잘못한 원수에게만 둔다면 원수 사랑은 불가능하다. 내 눈길을 자비 가득하신 하느님 눈길에 마주할 때, 그래서 진정한 '나'는 내 자존심도, 내 가족도, 내가 가진 물건도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 때, 원수나 미워하는 이는 이미 사라지고 다만 불쌍한 피조물이 보인다. 그러기에 첫 독서 레위기는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전하며, 복음에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병행구인 루카 6,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참조)라고 전한다.
결국 원수 사랑이란 관점의 변화를 요청한다. 내 입장에서 원수를 보는 시각에서 떠나서, 하느님 입장에서 하느님 눈으로 상대방을 볼 때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다. 나에게 몹쓸 짓을 한 사람을 내 입장에서 본다면 원수로만 보이기에 그를 사랑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 눈에는 참으로 못된 놈이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저 인간 역시 나처럼 불쌍한 죄인이다. 원수로 보이던 상대방이 사실 상처 많은 환자라서 몹쓸 짓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고도 자기 잘못을 모르니 더욱 불쌍한 인간으로 보인다.
내 눈에 비친 모습이 아닌, 하느님 눈으로 원수를 보아야 할 이유를 바오로는 둘째 독서에서 이렇게 일러준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고 존엄한 존재다. 그렇듯이 내 원수 역시 하느님의 영을 지닌 하느님의 성전으로 대하라는 말씀이다.
내 입장에서 하느님 입장으로 보는 변화, 내 생각만 하는 입장에서 상대방 생각을 먼저 하는 시각의 변화가 자신에게 손해가 아니라 존재의 가치를 한 단계 높이는 길이다. 입장의 변화가 가져오는 새로운 세계가 어떤 것일까? 간디의 일화가 떠오른다.
"막 출발하려는 기차에 간디가 올라탔습니다. 그 순간 그의 신발 한 짝이 벗겨져 플랫폼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기차가 이미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간디는 그 신발을 주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간디는 얼른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벗어 그 옆에 떨어뜨렸습니다. 동행하던 사람들은 간디의 그런 행동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유를 묻는 질문에 간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신발 한 짝을 주웠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머지 한 짝마저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내 입장만 주장한다면 쓸모없는 신발 한쪽만 들고 세상을 원망하며 살아갈 것이다. 상대방 입장을 배려하고 나누고 용서한다면 내게는 신발이 한쪽도 없지만 누군가에게 온전한 신발 한 켤레가 주어지고, 그만큼 세상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곳이 될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