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5주일 가해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본문
연중 제5주일 가해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이르신다. 성경에서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고(욥 6,6) 상하지 않게 보존하며(바룩 6,27), 제물(레위 2,13)과 신생아를 정화시키며(에제 16,4), 약속이나 계약의 항구함(2역대 13,5; 민수 18, 19)을 의미한다. 소금은 또한 녹아 없어져야 제 기능을 수행하기에 희생의 상징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원문은 ‘땅’)에 살맛을 주고 부패를 막으며 주변 세계를 정화시켜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하게 하는 존재라는 말씀일 것이다. 또한 소금처럼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십자가의 삶으로 주님을 따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말씀으로 들린다.
성경에서 “빛”은 하느님의 첫 축복(창세 1,4)으로써 성경 전반에 걸쳐 어둠과 대조되어 생명, 행복, 구원, 평화, 복, 하느님의 현존, 주님의 날 등을 의미하며, 특히 신약에서는 예수님 자신을 뜻한다(요한 8,12). 오늘 주님께서는 더 나아가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역시 예수님의 빛을 받은 빛의 존재라고 선언하신다.
말씀의 뜻은 이 구절이 자리하고 있는 맥락을 살피면 잘 드러난다. 이 말씀은 지난주에 들은 "여덟 가지 참된 행복" 선언에 이어진 말씀이다. 당시 사람들은 가난에 찌들고, 온유하게 살다가 땅을 빼앗기고, 폭정에 기가 죽고, 해방을 꿈꾸며 불의에 저항하며, 인간답게 살고 싶지만 사회적 차별과 율법에 짓눌려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상처 입고 지친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은 그들이 참으로 행복한 이들이라고 선언하셨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마음이 가난한 이, 지금 우는 이, 온유한 이, 옳은 일을 하느라고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초라하고 무력해 보일지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께 의탁하기에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말씀이었다. 오늘 복음 말씀은 그 선언에 바로 이어 제자들에게 가난하고 울고 있고 온유한 당신들이 어둠을 비출 빛이자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떤 근거로 그리 말씀하셨을까?
예수님은 언제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보셨다. 하느님은 우리를 만드시고 매우 좋았다고 말씀하셨다(창세 1,31 참조). 그런데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인간의 좋은 모습은 사라졌다. 당시 대부분의 평민들은 정치적으로 식민지 치하에서, 경제적으로 수탈당하며, 사회적으로 불평등과 차별을 겪으며, 신앙적으로 믿음의 기쁨보다는 율법을 어기는 죄책감에 눌려 지냈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존감이 바닥난 상태였다. 하느님은 우리를 100점짜리로 만들어 놓으셨는데 사람들은 10점도 안되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 오늘 복음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본래의 너희는 100점짜리 인생이다. 넉넉하게 가지지 못했다고, 유명하지 못하다고, 차별당한다고, 힘없다고 주눅 들지 말아라. 하느님이 너희를 본래 빛으로, 소금으로 만드신 사실을 기억하라. 자부심을 잃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라.'라고 선언하시는 말씀이다.
여기 손수건이 하나 있다. 2000원짜리다. 그런데 이 손수건이 김대건 신부님이 가지고 있던 손수건이라면 얼마가 될까? 값을 치기 힘들게 귀할 것이다. 이 손수건에 보석이 박혔기 때문인가? 아니다. 손수건에 김대건 신부님의 땀이 묻어 있기에 귀하다. 손수건은 누구의 땀이 담겼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 겉보기에 싸구려 손수건 같은 우리이지만, 예수님은 그런 우리가 하느님의 땀과 같은 빛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소금이 담겨 있다고 선언하신다. 복음 말씀대로 우리 존재에 하느님의 빛과 소금이 담겨있다. 내 삶이 그토록 가치 있기에 넘치는 자존감과 힘찬 용기를 가지고 빛을 비추고 맛을 내며 살라는 기쁜 소식이 오늘 복음이다.
예수님은 그런데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버려질 것이라고 이르신다. 소금이 제구실을 해야만 존재 이유가 있다는 말씀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신앙인으로서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 부모 노릇, 자식 노릇, 신자 노릇을 제대로 하기가 쉽지 않다. 자신을 반성하면 짠맛을 잃어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왜 짠맛을 잃게 될까? 소금은 자신을 녹여 자기의 모습이 없어져야 제 역할을 한다. 녹지 않는 소금은 쓸데없는 물건이다. 짠맛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앙인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많은 능력이나 다양한 경험이나 높은 명성을 지니고 있어도 자신의 희생 없다면 짠맛 잃은 소금이 되고 만다.
예수님은 이어서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며,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인 등불은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고 말씀하신다. 내 빛이 너무 작다고 산 옆에 숨거나, 내세울 게 없다고 부끄러워 함지박 속에 숨지 말고 당당하게 등경 위에 올라가라는 말씀이다. 첫 독서에서 이사야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빛을 비추게 되는지 일러준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예수님의 제자는 겉보기에 초라하고 미약하여도 예수님 보시기에는 빛이고 소금이다.내가 하느님께 그토록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나도 소금처럼 남을 위해 희생하는 기쁨을 누리고, 내가 받은 예수님의 빛을 남에게 전해주게 된다. 어떻게 녹아서 짠맛을 내고, 불타올라 빛이 될 수 있을까? 둘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전한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움직이게 할 때, 곧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둘 때” 자신을 녹여 세상에 맛을 주고, 자신을 태워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된다.
그렇게 세상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라고 선언하시며 이렇게 말씀을 마무리하신다."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