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일 가해 -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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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2주일 가해 -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부활 후 예수님의 제자들이 두려움에 문을 모두 잠그고 숨어 있었다고 복음은 전한다. 무엇이 두려웠을까?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의 해코지가 두렵고, 자신의 미래가 두려웠을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 왜 그렇게 두려웠을까? 두려움은 신뢰가 없을 때 생긴다. 사람들은 서로 믿지 못할 때 두려움이 생기고 마음의 문을 닫는다. 이와 반대로 한밤중에 공동묘지를 지나가더라도 아버지 손을 잡고 가면 두렵지 않다.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을까?
예수님은 두려움에 문을 잠근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성령을 받아라.” " 성령을 받을 때 두려움이 없어진다. 성경에서 성령은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숨결(루아하)이었다. 창조의 숨결인 성령을 받는 것은 삶이 내가 좌우할 수 있는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창조하신 하느님 것이기에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는 자세를 말한다. 마음을 열고 성령을 받아들여 하느님께 삶을 맡기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아무리 험한 세상일지라도 부활하신 분의 손을 꼭 잡고 가면 두려울 것이 없다.
부활 신앙과 관련하여 오늘의 중요한 등장인물인 토마스를 보자.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다는 제자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토마스는 말한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을 믿으려 하는 현대인의 모습이다. 보고 만질 수 있는 남편의 수입 액수나 자식들의 성적표만을 믿으려 하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아내나 남편의 피곤한 삶의 숨소리나 자식들의 성장의 몸부림, 늙은 부모의 애절한 한숨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 불신이 마음의 문을 닫아걸게 하고 가정을 병들게 한다.
그런데 토마스는 왜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을까? 근본 원인은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라는 사실에 있다. 그가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면 주님 부활을 못 믿겠다고 우기지 않았을 것이다.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토마스는 세상 일을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서" 지신이 결정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신앙은 혼자서 찾을 수 없다. 누구도 스스로 생명을 줄 수 없듯 스스로에게 신앙을 주지 못한다. 믿음은 다른 이로부터 전달받으며, 받은 신앙을 이웃에게 전달해야 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찾은 신앙은 주님이 공동체를 통해 전하신 신앙이 아니라 자기식의 신앙이다. 그 신앙은 가짜다.
주변에서도 종종 "착하게 살고 마음으로 믿으면 되었지 굳이 성당에 다닐 필요가 있느냐? 양심으로 믿으면 되었지 꼭 미사에 나가거나 본당 활동을 해야 하는가? 비록 지금은 냉담 중이지만 내 신앙은 분명하다, 지금은 어려우니 형편이 나아지면 신앙생활을 하겠다"라고 말한 이들이 많다. 제자들을 떠나 혼자서 신앙을 찾으려다가 불신에 빠지는 토마스의 모습이다. 진정한 신앙은 제자들과 함께, 즉 교회 안에서 공동체를 통해서 드러난다. 이런 이유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다음에,"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너희"라고 표현한 제자들 전체로 대표되는 교회에 당신의 죄 사함의 권한을 주신 것이다. 스스로 참회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죄 사함을 받으려는 개인주의적 노력은 예수님의 뜻과 거리가 멀다. (예화: 아우가 물었다: “형, 같은 죄인인데 왜 예수님께 의탁한 사람만이 다시 삽니까?” “돌멩이를 바다에 던져보아라. 어찌 돌멩이가 뜨겠느냐? 그러나 배에 실린 돌멩이는 가라앉지 않는다.”)
혼자 힘으로 자기 식대로 믿어보려던 토마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당신의 상처를 직접 만져보라고 이르신다. 그러자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한다. "저의 주님"이라는 고백에 담긴 "주님"은 남의 말을 듣고 추상적으로 생각하던 막연한 주님이 아니고, 자기감정을 투사하여 자기가 만든 신도 아닌 나와 인격적 관계를 맺은 주님, 나를 아시고 내가 참으로 체험했기에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주님이 예수님이라는 신앙고백이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 드리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라는 고백은 당시 예수님을 처형한 로마 제국과 유다 지도자들을 포함해서 이 세상의 모든 왕과 권력자들, 주인 행세하는 힘센 것들이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는 고백이다. 사람이든 재물이든 건강이든 성공이든 다른 무엇도 나의 주인이 아니고, 다만 부활하신 예수님만 나의 주님이고 하느님이라는 선언이다.
토마스는 쌍둥이였다고 성경은 전한다. 토마스와 쌍둥이인 형제는 누구일까? 교부들은 토마스의 쌍둥이는 바로 주님을 따르려는 모든 신앙인들이라고 해석한다. 대개 쌍둥이는 함께 행동한다. 신앙인들은 혼자 살아보려고 제자단을 떠나기도 하고, 보지 못하면 믿지 못하겠다고 우기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도 우리에게 오신 주님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인의 여정이 바로 토마스의 여정이기에 우리가 토마스의 쌍둥이라고 풀이하였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 자신의 주님이고 자신의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이는 자신에게 죽고 참된 생명으로 부활한 이들이다. 토마스가 보고 만졌던 주님의 몸을 우리는 미사 때마다 우리 손에 받아 모신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을 모시는 그 순간 우리도 진정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고백하는 부활 신앙을 기도하자.
예수님은 끝으로 토마스에게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신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상처를 보지 않고도 고통과 부활을 믿듯이, 인간의 고통과 상처를 만나면 거기서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상처를 보고, 더 나아가 그 고통이 부활로 이어지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사람들이다. 세상의 고통을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결합시키는 이들은 힘들고 아픈 삶을 절망으로 끝내지 않고 새로운 삶으로 부활하리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을 누린다. 그러기에 주님이 이르신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