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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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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5주일 가해 -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3-05-06 11:11   조회: 2,986회

본문


부활 제5주일 가해 -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복음은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이별을 전하는 고별사의 한 부분이다. 예수님의 승천을 앞둔 부활 시기에 이 말씀을 다시 듣는 뜻은, 죽음뿐 아니라 승천 역시 우리가 주님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고별 상황이기 때문이리라. 남겨둔 제자들을 위로하듯 예수님은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신다. 죽음이나 승천은 끝이 아니라 이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건너감임을, 삶의 연속임을 이르시는 말씀으로 들린다. 끝이 아닌 영원으로 건너가는 길, 그 길은 어떤 길일까?

토마스가 그 길을 여쭙는다: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고 이르신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구원에 이르기에 예수님은 길이시다.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갈 때 하느님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에 예수님은 생명이시다. 예수님을 따름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진정한 삶의 원리이기에 예수님은 진리이시다. 길은 알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가기 위해 있다. 아무리 예수님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해서 잘 안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지 않으면 생명에 이르지 못한다. 신앙의 진리는 정지되어 굳어버린 논리적 이론이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여정이다.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걷는 신앙인은 머리로 수긍하는 진리를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진리이신 주님께 마음의 바탕을 두고 생명력 넘치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A. 그륀)

이 말씀에 엉뚱하게도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고 요청한다. 필립보의 바람은 믿는 이들 대부분의 바람이다. 믿음의 대상인 절대자 하느님을 뵌다면 확고하게 신앙이 정립될 것 같아서다. 그런데 구약에서 사람들이 하느님의 얼굴을 보면 죽는다.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 (탈출 33, 18). 그러기에 십계명은 하느님의 형상을 만들지 못하게 했고, 그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못하게 명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르신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를 통해 당신의 얼굴을 인간에게 보여주신다. 더 나아가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라고 이르신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 당신 얼굴을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직접 말씀하신다는 선언이다. 이 장면에서 "믿음"이란 단어가 4회 등장한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 안에 예수님이 계신 '상호 내재'의 신비는 믿음으로 받아들일 신비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께서 계심을 믿는 것이 신앙이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싶다면 예수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보고 싶다면 예수님을 보고, 하느님을 모시고 싶다면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신앙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이 예수님 안에서 일하시는 신비를 믿는 이들은 예수님의 일, 곧 예수님 안에 계신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된다. 아들과 아버지의 일은 사랑이니, 사랑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하고, 우리 얼굴은 하느님의 얼굴이 된다. 그때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듯", 우리 얼굴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그렇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게"(주님의 기도) 된다. 그렇게 예수님과 내가, 하느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신비로 말씀은 우리를 초대한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께서 계심을 믿지 못하면 종교적 탈선에 빠진다. 하느님을 직접 보려고 자기 식대로 자신의 바람을 투사한 하느님을 만들고 '만들어진 신'을 섬기는 것이 우상 숭배다. 이러한 우상 숭배는 자기들이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기에 자기들만 구원받는다는 독선적 주장을 하거나, 자신이 신봉하는 이념이나 가치를 절대화하고 신격화하며 여타의 신념은 몰살하려는 근본주의적 일탈의 형태를 보인다. 혹은 하느님을 볼 수 없기에 절망적으로 신을 불신하는 무신론에 떨어지기도 한다. 이 모든 일탈은 실상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심을 믿지 못한 결과 아닐까?

"지난 4월 법회 때였다. 불자 한 분이 법회가 끝나자마자 내 뒤를 바짝 따라오더니 가지고 온 책을 한 권 펼치면서 '좋은 말씀'을 한마디 거기에 적어 달라고 했다. 나는 방금 법회에서 좋은 말이 될 것 같아 쏟아 놓았는데 그에게는 별로 좋은 말이 못 된 것 같았다.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 말귀를 못 알아듣는 이런 사람에게 더 할 말이 어디 있겠는가. 하는 수없이 그의 요구대로 '좋은 말씀'이라고 종이에 가득 찰 만큼 크게 써 주었다." (법정)

좋은 말씀을 듣고서도 한마디 써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남의 이야기일까?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 없이 하느님을 뵙겠다고 여기저기 쫓아다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이르신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좋은 말씀은 어디에 있는가? 그대가 서 있는 바로 지금 그곳에서 자기 자신답게 살고 있다면, 그 자리에 좋은 말씀이 살아 숨 쉰다." 법정 스님은 이렇게 수필을 마무리한다. 하느님은 어디 계시나? 지금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 안에, 우리에게 살과 피로 오시는 예수님의 성체 안에, 언제든 자비를 베푸시고 위로하시며 격려하시는 사랑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좁은 문으로 가신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지금 여기서 사랑하고 용서하는 진리를 실행하며, 아버지와 하나 되신 분처럼 당신과 하나 되어 생명을 누리라고 주님은 오늘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러기에 둘째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르신다: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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