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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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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3주일 가해 -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3-04-24 08:53   조회: 3,041회

본문


부활 제3주일 가해 -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 이야기를 전해준다. 첫째, 둘째 독서에서 예수님의 수난 당시 주님을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후 힘차게 주님의 부활을 선포한다. 눈에 보이는 부활의 가장 큰 증거는 그를 체험한 사람들의 변화였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베드로의 변화가 대표적이다.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는 두 제자 이야기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참으로 기쁜 소식이다.

복음은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라고 시작한다.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예수님의 죽음에 낙담한 제자들이 낙향하던 중이었다.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던 제자들은 상실에 대한 슬픔과, 스승을 죽인 이들에 대한 분노와, 스승을 지키지 못하고 도망친 미안함이 마음 가득했을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낙담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다가오신다. 그런데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물론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믿지도 못하고 곁에 다가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을까? 성경은 그 이유를 "눈이 가리어"라고 전한다. '가렸다'는 것은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자기식대로 고정된 생각에 예수님을 묶어두고, 그 생각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니, 부활을 믿을 수도 없고, 자기들끼리 예수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도 옆에 오신 주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눈이 가려 자기 생각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낙담한 이들에게 먼저 다가오신 주님은 우리의 아픈 이야기를 듣고, 성경과 당신의 수난을 연결하여 설명해 주신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성경 말씀을 풀어주신다. 루카복음 24장 45절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라고 전한다. 여기서 성경은 구약(제1성경, 히브리 성서)이다,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였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성경 말씀의 감춰진 의미를 드러낸다. 이 순환 가운데 예수님은 현존하신다.

우리 삶에서 주님은 같은 양식으로 현존하신다. 사람이 되신 말씀인 예수님으로 인해 고통과 슬픔을 포함한 나의 삶이 지닌 신비가 드러나고, 예수님의 신비(말씀)가 내 삶에서 밝혀지는 순환이 일어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렇게 무덤이 아닌 우리 가운데 현존하신다. 우리 역시 삶의 고통 등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 '눈이 가리워', 자기 생각에 고정될 수 있다. 그 상황에서 눈을 뜨고, 자기 밖으로 나오려면 성경을 읽어야 한다. 주님이 들려주는 말씀을 들으며, 우리를 절망에 빠지게 하는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을 그리스도의 빛에 비추어 다시 읽을 때 주님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라고 말씀은 이어진다. 정황상, 예수님은 엠마오에 묵으실 계획이 없으셨던 것 같다. 그러나 제자들이 붙잡자 예수께서 그들과 머무셨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붙잡지 않았다면 끝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아무런 변화도 체험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말씀을 들으며 주님을 붙잡을 수 있을 때, 간절히 주님을 붙잡으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라고 복음은 전한다. 이 상황은 말씀에 굶주린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도,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도 빵을 나누어 주시던 분, 그 기억의 재현(anamnesis)으로서의 성체 성사를 암시한다. 빵을 나누어 주실 때 제자들은 지금 여기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알아 뵙는다(현재). 그제야 이제껏 방황의 여정에 내내 함께 계셨던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기억한다(과거). 더 나아가 앞으로도 현존하실 주님을 믿기에 방황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돌린다(미래).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실망과 좌절에 벗어난 우리가 돌아갈 곳이 어디인지 제시한다. 지리적 개념을 떠나 성경에서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계신 곳의 상징이고, 엠마오는 세상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예루살렘은 주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신 곳으로, 그리로 가는 길은 어려운 길이요 고난의 길이요 순교의 길이다. 제자들은 이곳을 피해 낙향하다가 주님을 만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한다. 부활 신앙으로 변화한 그리스도인이 살아갈 길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주님을 체험하면 세상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하느님께로 돌리라는 말씀이다.

이처럼 부활은 주님의 말씀에 나의 삶을 비춰볼 때 깨닫고 믿게 되는 신앙의 사실이다. 절망스럽고 낙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말씀에 비춰 돌아볼 때 주님을 만나는 사건이 된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걸으시고 말씀을 들려주시고 빵을 나눠 주신다. 말씀과 성찬 안에서 우리에게 당신을 건네시는 주님과의 만남으로 부활은 오늘도 지속된다. 그처럼 부활은 증명할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재현할 신앙이자 생명이다.

성경 말씀으로 우리의 "가리어"진 눈을 뜨고, 우리에게 다가오신 주님을 꼭 붙잡고, 성체성사로 당신을 온전히 드러내시는 주님을 내 안에 모시자. 그리고 패배자의 모습으로 낙담해서 엠마오로 향하던 발걸음을, 충실한 믿음과 굳건한 희망과 뜨거운 열정으로 예루살렘으로 되돌릴 은총을 기도하자. "주님,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나이다."(시편 16,11: 화답송)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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