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일 가해 -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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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일 가해 -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예수님이 공생활 기간 중 행하신 가장 중요한 활동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선포였다. 이를 위하여 제자들을 뽑으시고 교육하고 임무를 주시고 파견하셨다. 오늘 복음은 이를 요약하여 전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그분의 제자다. 따라서 우리들 역시 예수님의 제자이기에 예수님이 누구를 뽑고 무엇을 위해 파견하셨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 뽑은 제자들은 열 두 명이었다. 이는 구약의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상징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의 시작을 암시한다. 첫 독서에서 "모든 민족들 가운데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옛 이스라엘은 이제 예수님의 부르심과 파견을 통하여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 거듭난다. 그런데 베드로에서 배신자 유다에 이르기까지 열두 제자의 면면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내세울 게 없는 그저 그런 이들이다. 그 일은 제자들의 능력이 아니라, 제자들 안에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파견에 앞서 당신의 권한을 주신다. 그 권한은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고,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이었다. 한마디로 사람을 살리는 이 권한은 하느님 만이 행사하는 권한으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행하시던 권한이었다. 이 권한을 제자들에게 넘겨주신 뜻은 제자들이 세상에 속한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속한 이들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이제는 하느님께 속한 제자들이 선포하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할 사명을 주신다. 여기서 '하늘나라'라는 용어를 공간적 표상으로 받아들여, 天國이라는 국가 형태로 오해하기도 한다. 마태오는 하느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유대 전통에 따라 하느님의 나라 대신 '하늘나라'라는 용어를 복음에서 사용했지만, 신약성경 전체 용례를 보면 이는 '하느님의 나라'다. 예수님이 선포하시고 제자들도 선포하라신 하느님 나라는 현세적 국가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통치권 행사이며 그 결과 역사 안에서 어떤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시작되었다. 여기서 하느님은 세상과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행동하시는 하느님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하느님은 계시다. 그리고 하느님은 정말로 하느님이시다"라는 선포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느님이 세상의 중심이심을 선포하셨고, 이미 시작된 그 나라의 선포를 제자들에게 이어가라고 명하셨다(베네딕토16세).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행하라고 명하신 일들 - 앓는 이와 죽어가는 이들, 나병환자에게 제 모습을 되찾아 주는 일은 제자들 파견 이전에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었다. 그 모든 활동은 어쩔 수 없는 인간 한계인 악과 사탄의 위협에서 인간을 해방시키시는 하느님의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행할 수 있을까? 무슨 수로 앓는 이를 고치고, 죽은 이를 일으키란 말씀인가? 쳔형인 나병환자를 치유할 방도가 어디 있고, 게다가 나도 힘든데 남의 마귀까지 쫓아내라니?
그 비결이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말씀에 담겨있다. 나병에서 치유를, 죽음에서 되살아남을, 마귀로부터의 해방을 내가 거저 받았다고? 내가 언제 나병에 걸렸다가 치유되고, 죽었다가 다시 살고 마귀가 들렸다가 회복되었다는 말씀인가? 돌아보자. 죽음 같은 절망에서 일으켜 세우신 주님의 사랑, 나병보다 더 불결하게 썩어가던 나를 씻으신 주님의 자비, 정신이 나간 듯 방황하던 나를 당신 앞에 서게 하신 사랑을 되돌아보자. 이제 가서 그 사랑을 사람들과 나누라는 말씀이다. 그렇게 사랑이 드러나는 곳이 하느님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다. 그 나라가 오시기를 기도하며, 그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 제자들의 사명이라는 말씀이다.
바오로 사도는 둘째 독서에서 거저 주어진 우리 구원을 이렇게 선포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이렇게 구원은 무상으로, 거저 주어진 은총이다.
신앙 생활을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개 그들은 사람이 노력해야 그 대가로 구원이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힘써 노력하려니 신앙생활이 힘들고, 노력해도 대가가 주어지지 않으면 하느님을 의심하고 신앙을 포기하기도 한다. 이들은 당연히 남들에게도 받은 것이 없으면 나누지도 않는다. 이에 관해 교황님은 단호하게 이야기하신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저 받았기에 거저 줍니다. 은총을 거저 주며, 구원을 거저 줍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거저 주어지는 것을 거래하고 흥정하고 독점하려다가 받지 못합니다.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을 노력으로 얻으려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기도하면서도 마치 우리가 주님께 뇌물을 주는 것처럼, 보상원리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일은 좋지 않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에게 이런 일을 해주신다면, 저도 당신을 위해 이 일을 하겠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신앙생활의 동기나 의미를 상실한 이들은 은총의 무상성을 상실한 이들이다(C.M. Martini). 은총의 무상성을 깨달을 때 신앙의 동기가 되살아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를 두고 "성덕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지키는 것입니다. 곧, 무상성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성인이 되는 길입니다. 따라서 성덕을 은총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선물을 일상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룩함(성덕)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무상성을 지키는 일입니다."라고 강조하신다.
열 두 사도를 부르셨듯,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기에 우리는 이 자리에 모였다. 나병 같던 내 모든 상처를 치유하시고 주님 안에서 거듭나 다시 살게 하시고 어둠에서 해방되는 은총을 거저 받은 사람들이다. 오늘 주님이 제자들에게 명하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자: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