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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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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가해 -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3-06-13 10:04   조회: 2,797회

본문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가해 -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모든 생물체는 먹어야 산다. 그러기에 물질적이든 영적이든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하는 물음은 생존이 걸린 중대한 물음이다.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인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라고 이르신다.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 당신의 살로 육신의 허기를 채우라는 말씀은 아닐 것이다. 말씀의 의미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톨스토이의 단편을 통해 헤아려 본다.

하루는 하느님께서 천사 미카엘을 불러 한 여인의 목숨을 거두어 오라고 명령하셨다. 지상에 내려온 천사는 쌍둥이 딸을 해산하던 그 여인이 너무도 가련하여 하느님 명령을 거역하였다, 이에 하느님은 천사를 땅으로 추방하시며 문제를 세 개 주셨다. 그 해답을 찾아야 땅에서 돌아올 수 있는 문제였는데, 첫 번째 문제는 "사람의 가슴속에는 무엇이 있는가?"였다.

땅에 떨어진 천사는 구두 수선공 세몬에게 발견된다. 세몬은 외투 하나를 아내와 함께 입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었는데, 외상값을 보태면 외투를 살 만큼의 돈을 모았다. 외상을 받으려 갔지만 빚진 사람은 돈이 없다고 하였다. 울화가 치민 세몬은 준비한 외투 값으로 술을 마시고 오다가 교회 모퉁이에서 벌거벗은 채 하늘에서 쫓겨난 천사 미카엘을 만난다. 그리고 하나뿐인 외투를 입혀 집으로 데리고 온다. 세몬의 아내는 기가 막혔지만 곧 측은한 마음에 천사와 세몬에게 따뜻한 음식을 차려 준다. 그때 천사 미카엘은 미소 짓는다. 그 부부에서 미카엘은 하느님의 첫 번째 물음의 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들 마음속에서 '사랑'을 본 것이다. 가난에 찌들고 무능한 술주정뱅이 남편과 바가지나 긁어대는 부인으로 구성된 가정일지라도, 인간의 마음에는 사랑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둘째 문제는 "인간에게는 무엇이 허락되어 있지 않는가?"였다. 미카엘 천사가 자신을 구해 준 세몬과 함께 구두를 만들 때, 동네 갑부가 목이 긴 부츠를 맞추러 왔다. 그런데 갑부가 떠나자 미카엘은 주문한 부츠 대신에, 장례용 신발을 만든다. 그는 갑부의 등 뒤에 서 있는 죽음의 천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갑부가 새 부츠를 맞추고 돌아간 한 시간 뒤에, 하인이 와서 장례용 신발을 주문했다. 방금 부츠를 주문했던 갑부가 죽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들이 여럿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자신의 운명을 아는 지혜가 허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느님의 둘째 숙제는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하는 질문이었다.

셋째 문제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다. 천사는 어느 날 구두 가게에 신발을 맞추려 온 두 소녀를 만나 놀란다. 두 소녀는 몇 년 전 목숨을 거두려던 가련한 여인의 딸 들이었다. 그 불쌍한 여인은 쌍둥이 딸을 낳은 후에 죽고 말았지만, 그 딸들은 이웃의 착한 아주머니가 거두어서 잘 키웠는데, 벌써 여섯 살이 되었다. 미카엘이 하느님의 명을 거역하면서까지 살리려 하였던 여인의 딸들은, 미카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어미가 없어도 이웃집 여인의 따뜻한 사랑을 먹고 살았던 것이다. 천사 미카엘은 이렇게 고백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걱정하고 애쓰는 탓에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생각일 뿐, 실은 사랑에 의지해 살아간다. 사랑 속에 사는 자는 바로 하느님 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이 독백으로 소설은 끝난다.

톨스토이의 이 단편을 복음 말씀에 비춰본다. 첫 질문, 내 마음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나? 무능한 처지에 술만 좋아하고, 그런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고, 궁색하지만 욕심도 있고, 부족한 채로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인간은 바로 내 모습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가슴 깊이 사랑이 있다. 사랑이 사람다움의 표지다. 둘째 질문, “나에게는 무엇이 허락되어 있지 않는가?" 각자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 부츠를 맞추던 부자처럼 우리 역시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게 된다. 사랑하면서도 내일을 알 수 없는 운명 앞에 마지막 질문을 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예수께서는 오늘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고 이르신다. 당신을 먹고 당신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씀에 성체의 신비와 생명의 이치가 담겨있다. 누구나 먹어야 산다. 그런데 우리가 먹는 밥은 그냥 밥이 아니다. 식물들은 햇빛과 공기와 물을 먹고산다. 그 속에는 생명을 창조하고 돌보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있다. 인간이나 동물들은 식물이나 또 다른 동물들을 먹고 산다. 그것 또한 먹고살도록 마련해 주신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존재한다. 결국 모든 생명체들은 사랑을 먹고 산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라는 첫 독서 말씀대로 인간은 말씀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산다.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젖을 먹어야 산다. 그것은 단순한 젖이 아니라, 어머니의 생명이며 사랑이다. 어른은 밥을 먹고 산다. 밥은 단순한 음식물이 아니라 농부들의 땀과 정성이 깃들어 있고, 벼가 자라도록 햇볕을 비추시고 비를 내려 주신 하느님의 은총이 스며들어 있는 사랑이다. 게다가 쌀을 깨끗이 씻고 솥에 안친 주부들의 사랑이 들어 있다. 매일 먹는 밥은 단순히 한 그릇의 밥이 아니라, 한 그릇의 사랑이다. 생명은 사랑을 먹고 사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 16)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구원하시고자 당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사람들이 먹을 음식으로 자신을 내주신다. 그래서 오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라고 선언하신다. 한 조각의 밀떡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지, 한 잔의 포도주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피가 되는지 신학적 이론보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그 사랑을 먹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간직하면서 산다는 진리이다.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산다면 주님께서 주신 생명은 우리 역시 주님처럼 자신을 밥으로 내어 주도록 이끈다. 삶에 지치고 사랑과 위로에 굶주린 내 옆의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주어 생명을 살린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예수님처럼 생명의 빵이 되고,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이를 두고 바오로 사도는 둘째 독서에서 이렇게 이르신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성찬의 삶으로 초대하신다.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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