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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가해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3-06-06 09:45   조회: 2,87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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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가해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 강림에 이어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낸다. 공식 교리에 따르면 '위격으로는 셋이요 본체로는 하나"라고 규정된 삼위일체 개념은 용어부터 생소하다. 그래서 형이상학, 인식론 등을 동원하여 여러 방식으로 설명하지만 이해하기 힘들다. 사변적인 지식보다는 구원의 역사를 통해, 즉 성경에 드러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 그 신비를 헤아려보자.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은 고통과 죽음 등 자신의 한계를 체험하며, 이 한계를 건너가게 해 줄 신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 첫 독서는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의 지도자 모세에게 나타나신 신이 당신 이름은 '야훼'라고 선언하시는 장면이다. 종살이에서 해방을 체험한 히브리 사람들은 이 해방자를 하느님으로 섬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그 모습이 점점 희미해졌다. 착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악인이 득세를 하는 불의한 현실을 보며, 자신들을 해방시킨 하느님이 지혜롭고 정의로운 분이시면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을까? 과연 하느님은 믿고 인생을 맡길 수 있는 분일까? 하는 의문도 생겼다.

그 상황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말씀을 전하셨다. 율법을 글자대로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믿던 이들에게 법보다도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예수님은 가르치셨다. 의롭게 살아야 구원된다는 이들에게 당신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시며 사랑과 용서를 가르치고 실행하셨다. 예루살렘 성전에만 하느님이 계시다고 믿던 사람들에게 건물이 아니라 당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선언하셨다. 이승에서는 이런저런 어려움을 꾹 참고 지내다가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던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이미 사람들 가운데 와 있다고 가르치셨다.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마귀를 쫓아내시고 굶주린 이들에게 빵을 주심으로 그 나라를 보여주셨다.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두고 이분이야말로 진짜 예언자,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그리스도), 구원자, 종말 심판관인 '사람의 아들' 등등으로 부르며, 이제 사람이 제 모습을 되찾는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온 줄 알았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오직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뜻을 안다는 종교 지도자들과 하느님이 통치하는 나라가 세워지면 자신들이 누리던 통치권력을 빼앗길 것이라고 겁먹은 정치인들이 야합하여 예수님을 처형하였다.

예수님에 대한 모든 기대가 사라진듯한 이 사건의 끝에 극적인 반전이 이뤄졌다.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그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의 증언이 잇달았고, 부활하신 분을 보았다는 이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갔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은 이전의 모습과는 전혀 달라진 점이었다. 예수님을 모른다던 소심한 사람들, 두려워 숨고 도망 다니던 사람들이 돌변하여 감옥이든 형장이든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증언하며, 온전한 기쁨과 행복에 찬 생활을 하며 마치 살아생전의 예수님이 되돌아오신 것처럼 변화되었다.

어떻게 사람들이 저렇게 변할 수 있을까?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저 기쁨과 열정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성서 말씀에 비춰 이런 점들을 진지하게 논구하던 이들이 마침내 그 모든 사건을 풀 수 있는 열쇠를 발견하였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께서 계셨구나. 예수님은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셨구나, 예수님이 감히 소리 내 부를 수도 없던 '하느님(YHWH)'인 '주님(Kyrios)' 이구나, 그러니까 예수님과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그리고 하느님과 그 아들 예수님이 하나인 까닭은 예수님의 영과 하느님의 영이 하나이기 때문이구나. 태초에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숨이자, 부활하신 예수님이 숨을 불어넣으시며 받으라던 성령이 아버지 성부와 아들 성자를 하나로 일치시키는구나. 이 진리를 한 단어로 짧게 표현한 말이 '삼위일체'였다.

더욱이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과 무관한 사변적 이론이 아니라 그를 믿고 고백하는 이들을 그 신비에 참여시키는 신비다. 즉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만의 하나 됨이 아니라, 삼위가 누리는 일치 안에 그를 믿는 이들이 하나로 묶여지는 신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라고 이르신다. 영원한 생명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처럼,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엄청나게 기쁜 소식이다. 인간은 홀로 자기 충족이 가능한 존재가 아니다. 늘 관계 안에 있다. 인간의 원형인 하느님은 관계성이 본성이다. 즉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흐름이요 전적인 유대, 완전한 친교, 즉 사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춤이다! 실제로 고대 교부들은 삼위일체를 둥글게 도는 춤으로 묘사한다. 우리가 이 만찬의 참여자요,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과 친교의 춤 상대가 되는 것이다."(리쳐드 로어, 하느님과 춤을)

개인이든 가정이든 사회든 세계든 분열, 나눠짐이 갈등과 차별과 혐오와 고통을 부르고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그래서 자아 통합, 가정 화목, 사회 통합, 민족 통일을 외치지만 현실적으로 하나 됨은 요원하다. 삼위일체는 하나 됨의 길을 제시하는 신비다. 삼위가 하나가 되는 길은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에 내어 주시고, 그 아들은 세상을 위해 아버지께 자신을 내어주고, 성령은 이 내어줌을 하나로 묶어주는 데 있었다. 삼위일체의 신비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내어주고 섬기는 것이 하나 되는 길이다.

이 신비에 참여하라고 주님은 오늘 우리를 초대하신다. "자신을 버리고"(마르 8,34)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 내가 하나가 될 때, 자아가 통합된다. 가족이나 이웃과 내가 삼위일체처럼 서로를 존중하고 내어줄 때 이웃과 내가 하나가 된다. 자연과 환경을 지배하고 이용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존중할 때 자연은 나와 하나가 되어 생명의 신비가 밝혀진다. 그리하여 주님께 나를 내어드리면 유한한 내가, 나에게 당신을 내어 주시는 영원하신 하느님과 신성한 춤을 춘다. 그렇게 하느님의 영원성에 내가 참여한다. 그처럼 하나 됨의 신비가 서로 존중하고 내어주며 하나가 되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함축되어 있다. 이 신비에 참여하라고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기도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제2독서)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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