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대축일 - 당신 숨을 보내시어 온 누리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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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대축일 - 당신 숨을 보내시어 온 누리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
오늘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음을 기념하는 성령강림 대축일이다. 오늘 전례의 말씀은 하느님의 영이자 예수님의 영인 성령이 어떤 방식으로 오시는지, 어떤 사명을 가지셨는지, 그리고 누구에게 오시는지를 일러준다.
첫 독서인 사도행전은 성령이 내려오는 장면을 전한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사도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성령은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기에 바람, 불꽃, 혀 등의 상징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신다.
성령은 "바람"처럼 오신다. 성경에서 "바람"은 "숨(루아흐)"으로, "숨 쉬는 이의 영"을 상징한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숨을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듯, 하느님의 숨결은 생명을 주시는 힘이다. 복음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 성령을 받아라" 하고 말씀하신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의 숨은 죽음에서 우리를 살리는 성령이다. 성령은 사는 것이 숨이 막히듯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다시 일어나 숨 쉬게 하는 하느님의 생기다.
성령은 "불꽃"의 모습으로 오신다. 성경에서 불꽃은 모든 것을 정화하는 힘이자 어둠을 밝히는 빛이고 따뜻한 사랑을 상징한다. 세상은 제 생각만 하며 냉기가 흐르는 모습을 종종 보인다. 야박한 세상에 서로를 따뜻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성령, 거짓과 어둠을 몰아내고 믿음으로 환하게 빛나게 하는 성령, 불안과 두려움을 몰아내는 사랑의 불꽃인 성령께서 오시기를 간청하자.
성령은 "혀"의 모양으로 오신다. 신체 기관인 혀는 먹을 때와 말할 때 사용하는 신체 기관이다. 인간은 잘 먹어서 생명을 보존하고 말을 통하여 서로 소통한다. 성령이 오시어 생명을 주시고, 믿는 이는 성령을 통하여 진실을 소통하게 된다. 성경에서 혀는 말씀을 상징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분이 예수님이셨다. 예수님의 영인 성령은 주님의 말씀을 일깨워 주신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며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요한 16, 13-15)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다. 참으로 말이 많은 세상이다. 말로써 용기를 주는가 하면, 상처를 주기도 하고,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말 많은 세상에서 나의 삶을 구원하는 말씀을 청하자. 성령께서 오시어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고, 사랑의 말을 나누도록 이끌어 주시길 기도하자.
성령이 오시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말씀을 전하는데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고 한다. 소통의 놀라움이 성령 강림의 결과였다. 불통의 세상이다. 젊은이들이 쓰는 말을 노인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아내의 한탄을 남편이 알아듣지 못한다. 한쪽에서는 내 말 좀 들어달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다른 쪽에서는 조용히 하라고 입을 틀어막는다. 자기 말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틀렸다는 불통의 세상일수록 소통을 이루는 성령께 귀 기울여야 한다.
서로의 말을 알아듣는 성령강림의 기적은 어떻게 가능할까?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유는 상대방이 나와 다르기 때문이다, 이 다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면 상대방은 타인이 되고, 적대감이 생긴다. 나와 다른 상대방은 결국 나의 적이 된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다. 타인이 나의 적인 한 용서는 불가능하다(R. 과르디니). 자기중심적 생각을 버리고 나와 다른 타인에게 마음을 열면 성령이 오신다. 성령이 오시면 나와 다른 상대는 내가 이겨야 할 적이 아니라 성령이 머무는 형제로 보인다. 그때 부족한 점은 용서하고, 다른 점은 받아들이는 소통이 이루어진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이르신다.
성령의 활동을 두고 둘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라고 전한다. 이 말씀을 치릴로 성인은 이렇게 설명한다: "성령은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같다. 언제나 같은 형태로 내려오지만, 논에 떨어지면 벼를 튼튼히 자라게 하고, 밭에 내리면 야채를 키우고, 산에 내린 비는 숲과 나무를 자라게 하고, 강과 바다로 내린 비는 물고기를 자라게 하듯, 성령께서는 우리 각자를 서로 다르지만 제 모습대로 자라나서 한 생명 안에 엮어준다. 어떤 이에게는 자비심을, 어떤 이에게는 용기를, 어떤 이에게는 절제를, 어떤 이에게는 지혜를 각기 필요한 만큼 주신다."
그렇게 주신 성령의 은사는 공동체를 위한 것이기에 바오로는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라고 일러준다. 서로 다른 각자의 역할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전한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을 때" 성령이 강림하셨다고 전한다. 성령은 함께 있을 때 모두를 위해 강림하신다. 자기만을 위해서 혼자 힘으로 잘 살아보려는 이에게 성령은 오시지 않는다.
이제 성령께서 오시길 기도하자. 우리에게 오시어 세상에 가득 찬 적대감을 불길로 태우시고, 두렵고 부끄러운 세상의 죄악을 세찬 바람으로 쓸어버리고, 죽어가는 것들에게 주님의 숨을 불어넣고, 불통의 세상을 혀와 같은 말씀으로 소통시켜 주시길 기도하자. 내가 만나는 나와 다른 이들은 내가 이겨야 할 적이 아니라 주님 안에 한 형제로 보자. 성령의 힘으로 서로를 받아주고 용서할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주님, 당신 숨을 보내시어 온 누리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 (화답송)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