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일 가해 -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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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5주일 가해 -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었다
누구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좋은 결실을 맺길 원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기쁨과 평화보다는 의심과 불안이 큰데, 이러한 내 믿음이 좋은 열매 맺을 수 있을까?' 하고 자신의 신앙 상태에 의문이 들기도 한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우리에게 신앙의 결실에 관한 비유를 들려준다.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지고, 어떤 것은 돌밭에, 어떤 것은 가시덤불에 떨어져서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였지만,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었다"는 비유다. 이 비유를 씨앗이 좋은 땅에 떨어져야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로 알아들으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씨가 돌밭이나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면 열매를 맺기 힘든데,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인 내 마음이 이미 돌밭이나 가시덤불이었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열매를 맺을 수 없는 헛수고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하느님은 왜 씨를 비옥한 땅에만 뿌리지 않고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에도 뿌리실까? 하는 의문만 남는 해석이다.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으려면 예수님 시대의 그 지역 농사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당시의 파종 방식은 지금의 우리 방식과는 달랐다. 지금 우리는 밭을 갈아서 땅을 고른 후에 씨를 뿌린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팔레스티나 지역에서는 이와 반대로 씨를 먼저 뿌리고, 그다음 밭을 갈고 풀과 돌을 골라내었다. 즉 씨가 떨어지기 전 땅을 고르지 않고, 씨가 떨어진 다음 땅을 갈고 잘 가꿨다고 한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미 하느님의 씨앗이 우리 모두에게 뿌려졌으니, 이제는 우리가 마음 밭을 잘 가꾸라는 말씀이다. 좋은 결실을 위해 가물 때는 물을 대주고, 장마철에는 물을 빼주고, 척박한 땅에는 거름을 주며, 돌멩이와 가시덤불과 잡초를 제거하듯, 이미 씨앗이 뿌려진 마음을 가꾸라는 초대의 말씀이다.
마음 밭을 가꾸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 아무것도 심지 않은 땅에 물과 거름을 주며 가꾸는 농부는 없다. 농부는 비록 지금 눈에 보이지는 않더라도 땅에 씨앗이 담겨 있기에 정성스럽게 가꾼다. 마음 밭 가꾸기도 마찬가지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 안에 하느님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믿음이 마음 밭을 가꾸는 출발점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셨고, 그래서 이미 은총의 씨앗을 뿌려 주셨다는 믿음 없이는 밭을 돌볼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하느님의 씨앗이 내 안에 담겨 있음을 굳게 믿을 때 가뭄이나 장마와 같은 신앙의 위기, 두려움과 실망과 의심이 들 때도 꿋꿋하게 밭을 돌본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은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게 된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시작한 초기에 하신 말씀이다. 그당시 복음 선포를 시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씨 뿌리는 농부의 심정과 비슷했을 것이다. 씨 뿌리는 농부처럼 말씀을 선포하며 예수님은 말씀의 씨앗에 창조주 하느님의 생명이 담겨 있음을 굳게 믿으며, 씨앗과 그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가득 찼을 것이다.
농부가 밭에 씨앗을 뿌렸듯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안에 말씀의 씨앗을 심어주셨다. 더 나아가 주님은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이 열매를 맺게 은총을 주신다. 이를 두고 첫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주듯, 당신의 말씀도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라고 선포한다.
조금 깨어져 금이 가고 오래된 못생긴 물 항아리 하나가 있었다. 그 항아리의 주인은 깨어진 항아리를 물을 길어오는 데 사용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주인은 깨어진 항아리를 버리지 않고 온전한 항아리와 똑같이 아끼며 사용했다. 깨어진 항아리는 늘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내가 온전치 못하여 주인님에게 폐를 끼치는구나. 나로 인해 귀한 물이 새는데도 나를 버리지 않으시다니.' 어느 날, 너무 미안하다고 느낀 깨어진 항아리가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고 새로운 온전한 항아리를 구하지 않으시나요? 저는 별로 소용 가치가 없는 물건인데요." 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항아리를 지고 집으로 가다가 조용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얘야, 우리가 걸어온 길을 보아라." 그제야 항아리는 그들이 늘 물을 길어 집으로 걸어오던 길을 보았다. 길가에는 예쁜 꽃들이 싱싱하게 피어 있었다. "주인님, 어떻게 이 산골 길가에 이렇게 예쁜 꽃들이 피어 있을까요?" 주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메마른 길가에서 너의 깨어진 틈으로 새어 나온 물을 먹고 자란 꽃들이란다."
신앙인으로 살아온 세월이 깨진 항아리처럼 상처투성이고, 신앙이 굳지도 못하고 때로는 자신에게 실망하거나 하느님에 대한 의심이 들을 때도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씨앗이 있다. 나이 들며 총기는 줄고 아픈 곳만 늘어가며 삶이 깨진 항아리처럼 초라해 보이더라도 하느님은 우리를 믿으신다. 실망과 의심으로 힘들 때면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라는 둘째 독서의 바오로 사도 권고를 마음에 새기자.
내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씨앗을 심어주신 하느님은 내 부족함을 보고 쓸모없다고 버리시는 분이 아니다. 부족함을 통해 꽃을 피우시는 분이시다. 장마 때든 날이 가물 때든, 마음 밭이 척박해지는 실망이나 의심과 피로가 커질수록 하느님께서 내 마음에 씨앗을 뿌리셨음을 믿고, 인내와 희망으로 마음 밭을 가꾸자.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