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0주일 가해 -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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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0주일 가해 -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누가 구원받을 것인가? 예나 지금이나 지대한 관심사다. 제1독서에서는 구원을 위하여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하는 권고와 함께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계약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신다. 제2독서 역시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인의 구별 없이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라는 소식을 전한다. 출생 신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충실성에 따라서 구원받는다는 선언이다. 상식에 부합하는 합리적 가르침으로 보인다.
그런데 복음의 가나안 부인 이야기는 상식 밖으로 들린다. 마귀 든 딸을 고쳐달라는 이방인 여자의 호소에 예수님은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라고 대답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여인의 간청에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어떻게 이방인 여인을 강아지 취급하시는가? 이제껏 보여주신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 대한 사랑, 과부와 어린이와 세리, 죄인, 창녀들을 돌보시던 자비심은 어디로 갔나? 인간이 하느님의 작품임을 잊으셨나? 당혹스러운 장면에 담긴 메시지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자비를 청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도록 초대하시려는 의도로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복음의 여인은 천대받던 이방인에다가 무시되던 여자에다가, 아픈 자식을 위해 손쓸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는 무력한 존재 아닌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 인식, 진정한 의미의 가난이 진실로 하느님 앞에 나서는 조건임을 일러주시는 말씀으로 들린다. 이렇게 예수님은 여인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앞서 자비를 받아들일 그릇을 준비시키신다.
자신을 제대로 알고 더 내려갈 곳이 없는 그 존재의 바닥에서 진정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부르게 된다. 내세울 것 아무것도 없는 극한의 가난에서 비로소 온전히 하느님의 뜻만을 받아들이는 순명이 시작된다. 그러한 정화를 거친 뒤에 참으로 순수하고 간절한 심정으로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게 된다. 그렇게 부서진 모습이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는 여인의 대답에 담겨있다. 여인이 자신의 처지를 알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신앙에 도달하자, 그제야 예수님이 이르신다: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예수님은 물론 여인의 소망을 그냥 바로 들어줄 수도 있었겠지만, 덜컥 소망을 들어주었더라면 여인은 그저 딸의 병이 고쳐진 기적만을 기억하고 진정한 자기 자신과의 만남, 하느님과의 만남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 어쩌면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기적을 큰 특권으로 생각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자랑하느라 하느님과의 관계에 소홀해지는 더 나쁜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나이 많은 한 수도사가 정원에서 흙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많이 배우고 능력이 뛰어나다고 교만한 젊은 수도사가 그에게 다가왔다. 나이 많은 수도사는 젊은 수도사에게 말했다. "이 단단한 흙 위에 물을 좀 부어주겠냐?" 젊은 수도사가 물을 부으니 옆으로 흘러내리고 말았다. 그러자 나이 많은 수도사는 옆에 있는 망치를 들어 흙덩어리를 깨기 시작했다. 그는 부서진 흙을 모아 놓고 젊은 수도사에게 다시 한번 물을 부어 보라고 말했다. 물은 잘 스며들었고 부서진 흙이 뭉쳐지기 시작했다. 그때 나이 든 수도사가 이렇게 말했다. "이제야 흙 속에 물이 잘 스며드는구먼. 여기에 씨가 뿌려진다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거야. 우리 역시 깨어져야 하느님께서 거기에 물을 주시고, 그럴 때 씨가 떨어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수 있는 거지. 우리 수도사들은 이것을 '깨어짐의 영성'이라고 얘기한다네."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처럼 자신이 부서진 후에, 인간 실존의 한계를 받아들인 연후, 하느님의 모상인 본 모습을 회복시키신다. 부서지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창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많은 가나안 여인이 있다. 불치병에 걸린 가족, 방황하는 자식들, 몸과 마음이 병든 부모님 간병 등, 이들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도 효과가 없어 지친 이들이 가나안 여인이다. 크든 작든 우리 모두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예수님께 문제 해결을 간청한다. 그러다가 변화가 없으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신다고 낙담하거나 원망하기도 한다. 바로 그때가 가나안 여인을 대하시는 예수님 말씀을 새겨들으며, 우리가 겪는 문제 해결보다 더 중요한 예수님의 이끄심을,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일 때다.
예수님에게 문제 해결이 어렵지 않지만, 일시적 문제 해결이 예수님 삶의 최종 목적이 아니었다. 가나안 여인처럼 참으로 가난한 이들을 하느님 아버지께 이끄시는 것이 당신 삶의 목표였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 6)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가나안 여인처럼 무력한 인간, 가난하기에 하느님께만 의지하는 사람들이 가야 할 "길"이요, 하느님 아버지가 누구인지 일러주시는 "진리"이고, 아버지와 아들이 나누는 사랑을 체험하는 이들이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시다.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의 존엄성이 어디에 기인하는지 고백하며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이끄신다. 가나안 여인처럼, 부서진 채 하느님을 체험한 한 신앙인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주십사고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다.
행복해지고 싶어 기도했는데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다.
삶을 누릴 수 있게 모든 걸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걸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주셨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 모두 들어주셨다.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