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간 월 -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본문
연중 제22주간 월 -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예수님을 처음 만난 사람들은 예수님께 탄복한다.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보고 군중들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성취된듯한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그토록 기다려 온 구약의 예언을 성취시키는 분은 곧 위대한 왕이고, 큰 힘을 지닌 권력자여야 한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그런데 그 예언을 성취하는 권력자 예수는 우리가 잘 아는, 우리 동네 사람인 요셉의 아들이었다.
위대한 권력자를 우리가 잘 안다는 사실은 우리도 권력에 한몫 참여하리라는 기대를 준다.
적어도 타향에서 베푼 기적 정도는 고향 사람들에게 베풀고, 어쩌면 그 이상의 특전을 주시리라.
'대박이다! 한몫 잡았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 고향 사람들의 심정이자 세상의 현실이다(A. Vanhoye).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군중들의 큰 기대를 냉정하게 거부하신다. 왜 그러셨을까?
당신이 선포하시는 해방은 외적인 특권이나 권력에 편입하는 방편이 아니었다.
그 해방은 권력이 아닌 봉사, 소유가 아닌 내어 줌, 높아짐이 아닌 낮아짐을 통한 해방이었다.
이를 오해하면 구원과 해방을 오해하게 되고, 예수님과 하느님을 오해하게 된다.
동향 사람이라는 인간적인 정에 끌려 사람들이 하느님을 오해하게 내버려 둘 수 없다.
그러기에 동네 사람들이 화가 날 정도로 그들의 기대를 냉정하고 단호하게 거절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사람들의 실망과 분노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했을까?
어쩔 수 없다. 이러한 오해는 수난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니 그 이후도 계속될 것이다.
그 상황에서 주님은 다만 당신의 길을 가실 뿐이다.
예수님을 따름은 '한몫 잡아' 누리는 길이 아니라, 내어 주고 내려놓는 길이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