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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2주일 가해 -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3-09-04 15:00   조회: 2,695회

본문


연중 제22주일 가해 -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

 



지난주 복음에서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가 주어짐을 묵상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베드로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라는 말씀을 듣는다. 충격적인 추락의 이유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었다고 복음은 전한다. 무엇이 하느님의 일이고 무엇이 사람의 일일까?

예수님이 이르신 하느님의 일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이었고, 베드로가 고집한 사람의 일은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일은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일이었고, 사람의 일은 죽지 말라고, 희생하지 말고 잘 먹고 잘 살자는 집착이었다.

그 차이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복음의 장면을 살펴보자.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여기 쓰인 "반박하다"라는 동사는 "꾸짖어 충고한다."는 의미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고 ‘죽다니요, 그럴 수 없지요. 정신 차립시다. 잘 살아 봅시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당신을 따랐으니 덕 좀 봅시다, 황제처럼은 아니더라도 남들처럼 번듯이 살게 한몫 챙겨야지요.’라고 꾸짖으며 충고하는 모습이다. 베드로는 직전에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지만, 그분이 가시는 길이 자신의 예상과 달라지자 주님이 아닌 자신을 따르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준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 크든 작든 그 일은 하느님의 일이다. 이웃을 위해 시간을 내어주거나 밥 한 끼 나누는 작은 일이 바로 하느님의 일이다. 그러나 내가 왜 희생하냐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잘 살아보자고 우기는 것이 사람의 일만 생각하여 베드로에서 사탄으로 추락하는 길이다. 일찍이 간디는 제거되어야 할 사회악의 하나로 “희생 없는 종교”를 꼽은 바 있다. 예수님은 좋지만 희생은 싫다는 태도, 축복의 무지개만 보고 고통의 십자가를 외면하는 신앙, 자기희생을 거부하고 더 나아가 내가 살려고 다른 이를 무시하거나 적대감을 드러내는 행태가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짓으로, 제거되어야 할 사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학자들은 지금의 한국 사회를 진단하며 '스노비즘(속물주의)'의 시대, 혹은 스노보크라시(속물지배사회; snobocracy)라고 진단한다. 여기서 ‘스놉(속물)’ (라틴어 sine nobilitas - without nobility의 합성어)이란 본래 귀족이 아닌 천민, 배우지 못했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뜻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자신만 잘 살기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내버린 사람들을 말한다. 속물지배사회란 남보다 잘 살기 위해서는 윤리, 도덕, 양심, 체면, 상식, 인간성을 무시하는 사회를 말한다. 지금의 한국 사회가 바로 이러한 속물의 삶이 정당화되고 그 삶을 쫓아가고 있다는 진단이다.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무찌를 적으로 간주하는 차별과 혐오와 적대감이 만연하니 무차별 살인이 벌어지고, 부끄러움을 잊고 거짓과 궤변을 일삼으며, 자기 이익만 찾는 각자도생의 속물지배사회가 되고 말았다.

문제는 사람들이 각자도생으로 부자가 되고 권력을 휘두르고 유명해진 듯하지만 속물이 될수록 삶의 목적을 잊어버리는 점이다. 왜냐하면 속물들에게는 진정성을 바탕으로 한 성찰이 없다. 성공을 위한 방편인 도구적 성찰만이 있을 뿐이다. 도구적 성찰만이 있는 이들의 내면에는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자각하는 주체가 없다. 주체가 없는 삶, 모든 인간은 하느님이 만드신 존엄한 존재이고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살아야 하는 창조 목적을 망각한 삶은 결국 실패하게 된다. 즉 한 인격체로서의 존엄성을 상실하고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진정한 신뢰와 존경을 상실하며 하느님조차 잊게 되어 인간성 상실의 나락에 떨어진다. 그것이 속물사회-스노보크라시의 결과로, 존엄성을 잃은 사회이자, 복음에서 베드로가 사탄으로 추락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는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속물만 있지는 않다. 남을 위해 배려하고 희생하는 이들도 있다. 신사임당이 명절을 맞아 하인에게 쇠고기를 사 오라고 시켰다. 그런데 하인이 사 온 쇠고기는 상해 있었다. 그러자 신사임당은 하인에게 "다시 가서 그 집의 남은 쇠고기를 다 사와라." 하고 일렀다고 한다. 하인이 상한 고기로 무엇을 하려고 사 오냐고 연유를 물었더니, 신사임당은 "만일 다른 사람들이 상한 줄 모르고 그 고기를 사다 먹고 배탈이 나면 어떻게 하느냐?"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소인배의 속물근성이 자기만 살자고 각자도생하는 태도라면,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예수님의 길은 모든 이를 형제로 대하며 형제를 위해서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 길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다. 그 길은 위대한 인물만 가는 길이 아니라, 아무리 작은 일이더라도 자기 이익을 버리고 남의 생각을 먼저 하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작아 보여도 이러한 이의 삶은 거룩하다.

죽지 않고 속물로 살려다가 사탄으로 떨어질 것인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제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습니다.”(제1독서)라고 예레미야가 고백하듯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는 길은 고통스러운 길이다. '그 힘든 길을 꼭 가야 하나 하나? 좋은 게 좋은 거지. 내 편하게 살면 안 되나? 신앙생활이 참 어럽다'라는 혼잣말 속에는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주님을 반박하던 베드로가 숨어있다. 사탄의 유혹이다.

그리스도인 앞에는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다른 길이란 속물로 살려 하다가 사탄으로 추락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제2독서)로 바치는 길만이 생명을 누리는 길이다. 그러기에 자꾸 세상 일을 먼저 생각하며 속물로 살려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이르신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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