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5주일 가해 -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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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5주일 가해 -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자기 생각에 따라 엉뚱한 것을 믿는다면 낭패다. 오늘 듣는 말씀은 하느님은 우리 생각과 다른 분이라고 전한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제1독서) 복음은 정말 우리와 다른 하느님을 전한다. 저녁 무렵에 와서 일한 이들이 새벽부터 일한 사람들과 똑같은 품삯을 받았다는 비유다. 너무도 상식 밖이라 이해가 쉽지 않다.
비유에서 포도밭 주인은 세상, 혹은 교회인 당신의 포도밭에 모든 이를 부르시는 하느님을 상징한다. 주인은 왜 다섯 번이나 일꾼들을 찾으러 나갈까? 하느님은 아무도 당신 사랑에서 제외되는 걸 원치 않으시기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나 인간을 찾으신다.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따르려는 이들이다. 포도밭 주인이 다섯 번이나 일꾼들을 찾으러 나가셨듯, 우리 역시 "울타리(경계)" 바깥으로 계속 찾아가라는 말씀이다. 삶의 변방으로 나가 예수님과의 만남을 아직 경험하지 못했거나 인생의 진리이신 예수님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희망을 제시하고 마음을 열도록 초대하라는 말씀이다.
포도밭 주인은 왜 일찍 온 사람이나 늦게 온 사람에게 같은 보수를 줄까? 주인이 동일하게 나눠 준 품삯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일당이다. 이 일당은 한 가족의 하루 생계비다(J. Jeremias). 일찍 온 사람이나 늦게 온 사람이나 모두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 가족을 부양할 일꾼의 처지를 배려하는 주인은 모든 가장, 모든 인간의 구원을 배려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드러낸다.
한 편 주인이 모든 사람에게 같은 보수를 주자 아침 첫 시간에 도착한 일꾼들이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주인에게 불평을 늘어놓는다. 일을 많이 했기에 더 많은 품삯을 기대하는 일꾼의 말에 얼핏 공감이 간다. 그러자 주인은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라고 묻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보이는 성과와 그 대가인 돈이 성공과 가치의 척도이다. 하느님 나라는 이 세계의 기준을 뒤흔들어 놓는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일한 대가로 살아가는 자본주의가 아니다. 물론 놀고먹는 베짱이의 나라도 아니다. 노동은 존엄하다. 그러나 아무도 더 이상 저녁에 생계에 대한 근심과 두려움을 안고 집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아무도 혼자가 아니며, 이웃은 경쟁 상대가 아니다. 모두 함께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공동의 연대를 이룬다.
서로 갈라 먹으려는 투쟁이 지배하는 사회 기준으로 보면 이 비유는 비합리적이다. 하느님 나라를 기준으로 보아야 이해할 수 있는 비유다. 서로 돕고 끊임없이 용서하고 연대하는 새로운 세상을 예수님이 제시하신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세계화의 결과인 각자 도생의 경쟁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은 생계에 필요한 돈을 벌려고 노동에 지쳐 자신의 모습을 상실하고, 부유한 사람들은 더 부유하게 되기를 바라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모습을 상실한다. 신앙인도 하느님의 뜻이나 자비를 생각하기보다 우리가 받을 영적 보상을 생각하기에 바쁘다. 그러다가 자신보다 행복해 보이는 이웃을 보면 마치 복음의 일찍 온 일꾼처럼 투덜거리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비교, 시기, 질투, 욕심은 자아가 커지고 싶은 인간 본성에 기인한다. 그렇게 커지고 싶은 나의 본래 모습은 무엇이었나?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다가" 부르심은 받은 존재 아니었던가? 그 부르심에 내 삶이 의미를 갖게 된 사실을 감사하면 그만 아닌가? 불러주신 분과 부르심을 받은 사실보다도 옆 사람의 보수가 더 중요한가? 불러주신 분과 부르심을 받은 사실을 망각하면 자신이 삶이 거저 받은 선물이라는 무상성을 잊어버리고,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
이들에게 주인이 말한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 말씀은 우리와 다른 하느님의 참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발상을 전환하라는 요구다. 우리 식의 기준, 혹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기준으로 생각해야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된다. 세상의 기준으로 수고에 대한 대가를 요구한다면 우리는 "고용된 일꾼"에 불과하고, 이때에는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게 되고, 은총과 해방이 아닌 율법과 세상의 멍에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신앙의 목적이나 인생의 목적이 품삯만을 받으려는 데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투덜거리던 아침 일찍 온 일꾼이다. 그러나 우리와는 다른 하느님, 아침부터 늦게까지 나를 부르시고, 죄인이든 병자든, 일찍 왔든 늦게 왔든 모두 먹고살라고 하루 일당을 주시는 주님의 자비를 체험한 이들은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아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주님은 우리가 언제든 당신 포도밭에서 일하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를 초대하신다. 우리가 그 안에서 일할 때 느끼는 행복이야말로 주인이 바라는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다. 일의 대가 이전에 주님을 위해서 같은 포도밭에서 일할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이미 은총이다. (Jean Louis Ska)
둘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나는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라고 고백한다. 바오로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기에 삶의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주시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그 자체가 이미 상급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신앙인에게 죽느냐 사느냐, 많이 받았나 적게 받았나 하는 계산은 의미가 없다. 죽음에 의해서도 막히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이 자신과 함께 있는 사실로 넉넉하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긴 비유를 이 말씀으로 끝맺으신다. 첫째란 일찍 와서 많이 일하고, 많이 벌며, 큰 대접을 받으려는 제자들 -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를 잊어버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 꼴찌란 남 앞에 재능이든 외모든 건강이든 지위든 도무지 내세울 것 없는 이들 -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기에 자신의 "삶이 곧 그리스도"가 된 이들, "하느님만으로 넉넉한" 이들이다. 당신의 포도 밭인 이 세상에서 우리가 주님을 위해 일하도록 하느님에게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에 먼저 감사드리자. 주인이신 하느님의 거저 주시는 자비가 우리가 받을 보상이기에 참으로 감사드리자.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