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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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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1주일 가해 -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3-11-05 15:03   조회: 2,574회

본문


연중 제31주일 가해 -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오늘 첫 독서는 구약시대 사제들에게 복음은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전하는 경고 말씀이다. 그때와 지금은 시대도 다르고 사제직무도 다르지만, 성직자든 평신도든 책임을 맡거나 봉사하는 이들이 새겨들을 말씀이다. 

첫 독서에서 사제들에 대해 “너희가 말을 듣지 않고, 명심하여 내 이름에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리고 너희의 축복을 저주로 바꾸어 버리겠다.”라고 경고하신다. H.U. von Baltasar는 "교우들에게 아부하는 것이 현대의 사목자들이 빠지기 쉬운 우상숭배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보다 교우들이 좋아하는 말을 선포하는 세태를 지적한 말이다. 교우들이 싫어한다고 쓴소리를 못하고, 신자들 줄어든다고 듣기 편하고 달콤한 말만 하면, 사제 개인의 인기는 오를지 몰라도 하느님 말씀은 사라진다. 신자 수가 늘고 개인의 영예는 빛날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영광은 사라진다. 그 결과 종교가 동호회나 친목계 모임으로 전락한다. 교회가 편안함을 찾다가 거룩함을 잃어버려 세속화하면 "축복이 저주로" 바뀐다.

신자들도 문제다. 듣기 좋고 편한 말만 좋아하고, 쓴소리하면 사제나 교회에 등을 돌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둘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라고 전한다. 조금이라도 거북스러운 말을 들으면 반발하거나 외면하는 이들에게 하느님 말씀이 활동할 여지는 없다. 목자의 선포를 자기 취향대로 취사선택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 하느님 말씀은 우리 안에서 활동한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 등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고발하신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우리 시대 종교인들의 공통된 특징은 그들이 자꾸 남을 가르치려 한다는 점이다. '종교'를 '으뜸이 되는(宗) 가르침(敎)'으로 알아들은 결과로 보인다. '종교 religion'란 단어의 본 뜻은 '다시 Re + 묶는 것 ligare', 즉 하느님과 인간을 다시 묶는 역할을 의미한다. 종교는 가르침 이전에 만남이다. 인간이 하느님과 만나 주님과 다시 묶여 새로운 삶을 살아감이 본래의 종교다. 그러기에 말만 내세우는 가르침보다는 실행이 따르는 만남이 참 종교이고, 윤리 도덕적 훈계를 넘어선 새로운 관계가 종교의 참모습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의 복음선교'는 "현대인들은 스승들의 가르침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증인들의 증언으로부터 믿음을 갖게 된다."(41항)고 지적하고, '새 천년기'에서는 "현대인들은 - 흔히는 아마 무의식적으로 -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해 달라’는 요청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분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간청합니다"(16항)라고 일러준다. 목소리 큰 유명인이 아니라, 작고 이름 없이 살더라도 언행이 일치하는 종교인 안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신앙을 되찾고 교회를 다시 본다.

이어서 예수님은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라며 위선을 책망하신다. 위선은 자신의 모습을 겉꾸며 남에게 잘 보이게 하려는 태도다. 남에게 잘 보이려는 바람은 누구나 지닌 본성이기에 화장을 하거나 성형수술을 하기도 한다. 문제는 영적으로 더 낫게 보이려 하다가 진짜 모습이 감춰지는 데 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더 잘났다, 더 열심하고, 더 올바르다."라는 자만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한다. 게다가 거짓된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칭찬하면 자아도취에 빠져 계속 허상을 유지하고자 거짓의 노예가 된다. 이 상태로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타인에게도 하느님 자녀가 아닌 거짓된 상만 보여준다. 남에게 잘 보이려다가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더 나아가 하느님도 잃어버리게 하기에 예수님은 위선을 책망하신다.

심층 심리학은 인간에게는 누구나 두 가지의 ‘나’가 있다고 설명한다. 하나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나’로, 현실에 드러난 나(Ego)이다. 또 하나는 ‘내 속에 들어있는 나’로,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진 본래 나(Selfst)이다. 사람들은 자기 속에 들어있는 하느님의 모상인 ‘본래의 나’보다는 현실에 드러난 ‘남에게 보이기 위한 나’(Ego)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럴수록 참 나는 감춰지기에 하느님을 닮은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사라진다. 그러면 진실과 참된 관계는 없어지고 거짓과 자기도취의 노예가 되어간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남에게 보이는 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남들 앞에 흉내 내다 마는 원숭이가 아니다. 인간존재의 최고 가치는 우리에게 심어진 하느님의 모상을 발견하고, 하느님 자녀로서의 존엄성을 살아가는 데 있다. 그러기에 거짓의 노예로 우리를 끌어내리는 위선을 버리라고 이르신다.

겉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중요한 이유는 '보이기 위한 나'가 아니라 '참 나'만이 하느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이루기 때문이다. 모리스 젱델은 이렇게 풀이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고 원하는 사람은, 우선 자신의 이미지를 거짓되게 만들려는 생각을 버린 사람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우선 하느님께 그리고 모든 이웃에게 보여주는 사람이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진짜 얼굴을 찾으신다. 어떤 얼굴이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때 그 얼굴은 진짜다."

위선이 남에게 보이기 위한 태도에서 비롯된다면 이를 넘어서는 길은 남이 아닌 하느님에게 꾸밈없는 자신을 보이려는 마음, 남의 눈이 아닌 하느님 앞에 서려는 마음에 있다. 하느님의 자녀로 인정받는 기쁨이 없으면 남에게라도 "스승, 지도자, 아버지" 소리를 들으려 한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신다. "너희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한 분뿐이시고, 너희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그렇게 주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으로 넉넉한 자녀가 되라고 초대하신다. 나를 위해 살과 피를 내어주신 그리스도만을 스승으로 모시는 제자가 되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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