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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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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0주일 가해 - 첫째가는 계명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3-10-30 11:33   조회: 2,601회

본문


연중 제30주일 가해 - 첫째가는 계명




복음에서 율법교사가 예수님에게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을 던진다. 일반적으로 계명이란 삶에서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줄이고 보다 수월하게 목적을 이루게 하는 원칙이나 노하우 등을 일컫는 말이다. 율법이나 종교가 지닌 근본 목적이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예수님이 받은 질문은 어떻게 살아야 시행착오 없이 수월하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하느님께 가는 법, 혹은 길로 제시되어 온 율법 조문은 10계명에서 출발하여 자꾸 늘어난 결과 예수님 당시에 613가지였다고 한다. 너무 많아 기억하기 힘든 그 조문을 요약해서 가장 중요한 계명을 제시해 달라는 요청이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명료하기 그지없이 일러 주신다

사랑이 어떤 역할을 하기에 삶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될까?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사랑이 없이는 영혼이 살 수 없다. 영혼은 항상 어떤 것을 사랑하려고 하며, 영혼은 사랑에 의해서 존재한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사랑에 의해서 영혼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한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본래 사랑으로 살도록 만들어졌다. 의사들도 경험적으로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 “사랑은 삶에서 유일하게 진실하고 오래 남는 경험이다. 두려움의 반대말이고, 관계의 본질이며, 행복의 근원이다. 우리 자신을 이루고 있는 가장 깊은 부분이고, 우리 안에 살면서 우리를 연결해 주는 에너지이다. 사랑은 지식, 학벌, 권력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사랑은 모든 행위 너머에 있다. 삶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유일한 선물이다. 결국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환상과 꿈, 공허함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사랑은 진실의 근원이다.” (E. 쿼블러로스)

그런데 참으로 사랑이 무엇일까? 너무 많은 설명이 있어서 혼란스러운 질문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회칙에서 베네딕토 16세는 사랑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와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려는 움직임이라고 해석한다. 이 점에서 세속적이고 탐욕스러운 에로스적 사랑과 신앙적이고 이타적인 아가페적 사랑이 하나로 통합된다. 즉 "에로스가 처음에는 탐욕적 사랑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수록, 자신에 대한 관심은 점점 줄어들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더욱더 추구하게 되며, 자신을 내어 주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기’를 바라게 된다."라고 일러주신다. 남녀 간의 사랑이든 예술에 대한 사랑이든 가족애든 취미든 모든 사랑이 궁극에는 하느님 사랑과 합일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오는 것과 상대방과 하나가 되는 헌신이다. 자기에게서 나오는 과정에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집착과 욕심에서 벗어나게 되고, 상대방을 위한 헌신에서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이처럼 자신에게서 나와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됨으로써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하고, 하느님과 하나가 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주기에 사랑은 진정한 삶의 지혜이자 첫째 가는 계명이다.

성경 전체가 이를 증언한다. 구약 시작부터 창세기는 아담은 자신을 떠나 하와와 짝이 되어 한 몸을 이룬다. 신약의 전 내용은 하느님이 자신을 떠나 사람이 되시어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고 사람과 하나가 되신 사건 -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느님의 에로스요, 하느님의 아가페였다. 이를 종합적으로 통찰하여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결론을 내린다(1요한 4, 16 참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베네딕토 16세) 그분이 인간을 먼저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내주신 하느님이시고,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사랑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계명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사랑의 은총에 대한 응답이다."(상동)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어떤 관계를 가질까? 이에 관해 베네딕토 16세는 이렇게 가르치신다. "나의 삶에서 하느님과 그 어떤 관계도 갖지 않는다면(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 이상의 것을 전혀 볼 수 없으며, 그에게서 결코 하느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다. 오로지 ‘열심해지려고’, 또 ‘종교적 의무’를 다하려고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된다면, 나와 하느님의 관계 또한 메말라 버릴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그럭저럭 ‘괜찮지만’ 사랑이 없는 관계이다.

기꺼이 내 이웃을 만나 사랑을 드러내고자 할 때에만 나는 하느님께도 마음을 쓸 수 있다. 내가 이웃에게 봉사할 때에만 나는 하느님께서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시는지,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랑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외부의 ‘계명’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얻는 사랑의 체험에서 생겨난다. 이 사랑은 본질상 다른 사람들과 서로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을 통하여 자란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나오고 우리를 하느님과 일치시켜 주기 때문에, 사랑은 ‘하느님’이 되는 것이다. 이 일치의 과정을 통하여 사랑은 분열을 뛰어넘어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것, 바로 ‘우리’가 되게 한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1코린 15,28)이 되신다."(하느님은 사랑이시다, 18항)

그렇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하고, 사람과 하나가 되게 하여, 내가 세상에서 살아갈 의미를 주기에 첫째 가는 계명이다. 그러기에 사랑의 계명 앞에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권고한다 “그대는 단 한 가지 짤막한 계명을 받았습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그대 마음대로 하십시오. 침묵하려거든 사랑으로 침묵하십시오. 말을 하려거든 사랑으로 말하십시오. 바로잡아 주려거든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십시오. 용서하려거든 사랑으로 용서하십시오. 마음 깊은 곳에 사랑의 뿌리를 내리십시오. 이 뿌리에서는 선한 것 말고는 그 무엇도 나올 수 없습니다.”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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