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6주일 가해 -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본문
연중 제6주일 가해 -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사회에나 지켜야 할 규정이 있다. 오늘 들은 성경은 하느님 백성의 규정에 관한 말씀이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섬기며 인간답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규정이었다. 이 율법은 자유로운 의지로 지켜야 한다. 그래서 첫 독서는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라고 이른다.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 강요된 계명은 준수해도 의미가 없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만드셨기에, 계명도 자유 의지로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자유는 선택의 자유로 드러난다. 그래서 집회서의 말씀은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고 이어진다. 여기서 생명이나 죽음은 생물학적 개념이 아니라 영성적 개념이다. 즉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죽음이다. 삶에 의미를 주는 생명의 선택, 올바른 선택은 무엇일까?
복음은 생명을 선택하는 길을 일러준다. 예수께서는 이전의 율법과 당신의 입장을 대조하는(대당 명제) 방식으로 가르치신다. 율법의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라는 계명을,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새롭게 가르치시며, 외적인 계명 준수를 넘어서서 내적인 형제애를 강조하신다. 인간의 눈에는 죽이고 싶은 원수이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형제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길은 형식적 율법 준수에 있지 않고 하느님 마음을 따르는 데 있다는 선언이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라는 율법을 두고,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라고 새로이 가르치신다. 다른 사람을 볼 때 행동뿐 아니라 마음으로라도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탐욕에 빠질 것이 아니라, 그처럼 아름답게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 하느님을 찬미하라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을,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라고 새롭게 가르치신다. 인간에게는 표리부동(表裏不同) 한 면이 있다. 겉으로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마음속으로 거짓을 행하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온전히 정직해질 수 없음을 하느님 앞에서 솔직히 인정하면 함부로 맹세를 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생명의 선택은 우리가 다른 어떤 규정에 의해 살지 않고, 하느님 앞에 서서 하느님 눈으로 보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율법의 형식적 실천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진실한 삶이 율법을 완성하는 생명의 길임을 가르치셨다. 이제까지의 율법의 가르침에 대당이 되는 예수님의 새로운 말씀(복음서에는 오늘 말씀 이외에도 이혼에 관한 명제, 안식일에 관한 명제, 효도에 관한 명제 등이 대당 명제로 같은 차원에서 등장한다)은 한 마디로 변화하라는 권고다. 율법 앞에서 하느님 앞으로, 문자에서 정신으로, 인간의 능력에서 성령의 이끄심으로 건너가라는 초대의 말씀이다.
신앙은 이제까지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하느님과의 관계로 들어감을 뜻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 이렇게 변화된 삶이 신앙의 본질이다. 하느님과의 관계로 들어가는 변화는 기쁨으로의 초대이다. 집을 떠나 낯선 곳을 방황하던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 참여하는 잔치이자, 귀신에 사로잡혔다가 인간성을 되찾아 공동체로 돌아오는 기쁨, 귀머거리가 듣고, 중풍병자가 일어나고, 소경이 앞을 보고 죽었던 라자로가 일어나는 변화가 신앙의 기쁨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여 세례를 받은 신앙인이 믿지 않는 친구를 만났다. 미신자 친구가 세례 받은 친구에게 질문을 했다. "그래 자네 천주교인이 되었다지?" "그렇다네." "그럼 그리스도에 대해서나 삼위일체에 대해 많이 알겠군. 어디 한번 나에게 이야기를 해보게." "나는 그런 교리를 잘 몰라." "그런 것도 모르고 어떻게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겠나?" 세례 받은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 아는 게 없어서 부끄럽네. 하지만 내가 아는 분명한 사실은 3년 전에 나는 주정뱅이요, 빚도 많았고, 저녁마다 처자식들은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했다네. 폭력을 휘둘렀거든. 그런데 지금은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일도 열심히 하고, 저녁마다 식구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네. 이 모든 것이 신앙을 갖은 후에 일어난 변화라네."
변화된 신앙인은 옳고 그름에 집착하는 도덕적 완벽주의자가 아니다. 성경을 달달 외우지만 남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하는 이기주의자도 아니다. 옛날에 사회나 성당에서 한자리 했다고 과거에 집착하는 철 지난 허풍쟁이도 아니다. 이웃과 가정을 폭력적으로 파괴하며 아버지라서 그렇다고 우기는 폭행범도 아니다. 현실을 외면한 채 죽은 다음에 천당만 가면 된다는 상식 밖의 이단자도 아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변화된 삶을 사는 사람은 인생을 율법이나 인간의 제도에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앞에 설 때,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말씀을 따를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서,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서 변화가 이루어진다.
이를 두고 둘째 독서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지혜, 참된 지혜를 말하면서,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라고 일러준다. 이 말씀을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께서는 율법을 가르치실 때 글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은총으로 가르치시며, 기꺼이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깨닫게 해 줄 뿐 아니라 배운 것을 성실하게 실행할 마음을 주시고 또한 실제로 실행하도록 하신다."라고 풀이하였다.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이들은 참으로 행복하다. 주님께서는 오늘 그 행복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화답송)
[출처] 말씀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