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일 나해 "무엇을 찾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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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주일 나해 "무엇을 찾느냐?"
겨울 새벽에 환경미화원이 콧노래를 부르면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즐겁냐고, 추운데 힘들지 않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지금 나로 인해 지구의 일부분이 깨끗해지고 있잖아요?" 자신이 일을 하는 이유와 의미를 아는 사람, 자신의 소명을 깨달은 사람의 모습이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 소명을 깨달으면 비록 삶이 힘들어도 왜 하는지 알기에 기쁘고 감사하게 일하지만, 깨닫지 못한 이는 일을 하면서도 그 의미를 모르기에 두려워하며 억지로 한다. 소명은 사람답게 사는 길을 열어준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의 소명을 "성령 안의 삶"(교리서 1700)으로 정의한다. 성경 전반에서 하느님이 인간을 부르시고, 인간이 이에 응답하는 형태로 인간의 소명이 드러난다. 오늘 독서와 복음도 소명을 받는 이야기다. 첫 독서는 사무엘의 소명담을, 복음은 요한의 제자들의 소명담을 전한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신다. 예수님의 질문에 소명을 깨우치는 열쇠가 담겨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보고 깨달을 때 소명을 발견한다. "너는 무엇을 찾느냐 Id quod volo?" 서양의 수도원 수련소나 신학교 입구에 있는 글귀이다. "어떤 동기로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에 소명을 깨닫는 길이 담겼기 때문이다.
늦은 밤 산보하던 랍비 납달리는 경비원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고, "누구를 위해 걷고 있소?"라고 물었다. 경비원은 아무개의 집을 지키고 있노라고 대답한 뒤 뜬금없이 랍비에게 되물었다. "그럼 랍비께서는 누구를 위해서 걷고 계십니까?" 이 물음은 화살처럼 랍비의 마음에 꽂혔다. 그 랍비는 아무 말도 없이 경비원과 함께 긴 시간을 왔다 갔다 했다. 한참 후에 랍비가 말문을 열었다: "혹 내 심부름꾼으로 일하고 싶지 않소?" 경비원이 대답했다. "그런데 제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랍비 납달리가 대답했다: "내가 누구를 위해 길을 걷고 있는가를 늘 기억시키는 일이오." (마르틴 부버, 인간의 길)
지금 내 삶의 동기를 질문할 때, 나의 소명, 존재 이유를 깨닫는다는 이야기다.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해 줄 이는 누구일까?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영이시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본래부터 자신이 누구를 위해 왜 사는지 찾으려는 진리의 목소리가 들어 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졌다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에게로 부르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면의 목소리를 듣기가 쉽지 않다. 소음 때문이다. 소음은 진리의 음성이 들리지 않도록 훼방을 놓으며 소명을 찾는 작업을 방해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방탕한 삶에서 회심한 후 이렇게 고백하였다: "오, 진리여, 나는 너의 음성을 들었다. 평화를 모르는 이들의 요란한 소음 때문에 나는 하마터면 그 음성을 못 들을 뻔했다." 우리 밖에서,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들: 편한 대로 대충 살라고, 남 생각하지 말고 자기에게 이득 되는 것만 하라고, 손해 볼 일을 왜 하냐고 등등의 소음은 끊이지 않는다. 이 소음에 묻히면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 "사람이 아무리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고 생을 맘껏 즐기며 큰 권력을 장악하고 위대한 일을 성취해 낸다 해도 하느님의 이 음성을 듣지 않는 한 그의 삶에는 길이 없다."(M. 부버) 소명을 깨닫지 못하면 세상에서 성공을 했더라도, 사회에서 존경받는 지위에 있더라도, 나이를 많이 먹었더라도 행복할 수 없다.
신앙의 여정에서 하느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양심의 소리로, 자연이나 사람이나 사건을 통하여 인간을 부르신다. 그런데 인간은 이 부르심을 소음 때문에 알아듣지 못하거나, 혹은 무지로 오해할 수도 있다. 첫 독서에서 소년 사무엘이 잠들었을 때 하느님이 부르시지만 사무엘은 대답을 못한다.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세 번씩이나 사제 엘리에게 가고, 엘리는 그제야 부르시는 분이 주님임을 알려준다. 엘리의 역할이 오늘날 교회의 중재 역할이다(H. U. von Baltasar). 사무엘처럼 우리도 부르심을 듣지만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할 수 있다. 신앙인이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신앙이 아니라 교회의 신앙을 추구할 이유다.
그런데 엘리는 소명의 의미를 일러줄 수 있을 뿐 대답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소명에 대한 응답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각자의 몫이다. 부르심을 알아차린 사무엘이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때부터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각자가 응답할 때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길이 열린다.
소명을 들은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복음에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예수님께 질문하자 주님은 "와서 보아라."라고 말씀하셨고,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묵었다."라고 전한다. 부르심에 응답은 주님과 함께 묵음으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 삶의 소명은 예수님이 묵으시는 곳을 찾고 그분 곁에 머물 때 완성된다.
제자들에게 와서 보라고 하신 예수님이 묵고 계신 곳은 어딜까? 그곳은 지리적인 장소가 아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계신 곳을 두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과 아버지가 서로 안에 머무르며 일치를 이룬다는 말씀이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 15, 4)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당신 안에 머물 길을 일러주셨다. 즉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 56)고 약속하셨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고요한 마음으로 아침기도를 드리며 주님께 하루를 봉헌하고, 저녁에 잠들기 전 하루 동안 우리가 받은 자비에 감사하며 저녁기도를 드리는 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 머무는 모습이다. 또한 성체성사를 통해 그분은 우리 안에 머무시고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물며 궁극적으로 하느님 아버지와도 하나가 된다. 그렇게 주님과 함께 머물면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이자 "성령의 성전"이 된다고 바오로 사도는 전한다(제2독서).
우리 모두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행복은 텔레비전의 소음에서, 핸드폰에서 쏟아지는 정보에서, 마음속에서 수시로 올라오는 목소리와 잡념에서 오지 않는다. 성경 말씀과 기도 중에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응답할 때 소명을 깨닫고, 그 소명에 따라 주님을 받아 모시고 주님과 함께 머물 때 그리스도의 지체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서 우리의 소명이 완성될 것이다. 그렇게 행복해지라고 주님이 우리를 초대하신다.
[출처] 작성자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