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3 주간 월 - 너는 나를 따라라.
본문
연중 제13 주간 월 - 너는 나를 따라라.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성경에서 "따름(akolouthein)"은 언제나 동사로만 사용되는, 구체적이고 역동적인 단어다.
이 "따름"은 나란히 걷는 모습이 아니라 "뒤따름"을 의미하는데, 특히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표현한다.
유대교에서 랍비의 학생은 특정한 스승을 따르는 이가 아니라 모세오경(Torah)를 배우는 이를 뜻했다.
예수님은 Torah가 아니라 당신을 배우고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유대교에서 제자들은 랍비를 섬겼지만, 예수님은 스승이셨지만 제자들을 섬기셨다.
랍비는 Torah 해석을 위해 구체적 학습체계를 갖추고 가르치며 고정적으로 생계비를 받았지만,
예수님은 자유로운 입장에서 하느님 다스림의 선포를 위한 파견 목적으로 가르치셨다.
게다가 공생활 내내 생계가 불확실한 떠돌이로 사셨다. (G. 로핑크, 예수마음코칭)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머리를 기댈 곳"이란 잠들 곳, 쉴 곳, 혹은 죽을 자리를 뜻한다.
그 자리가 없는 것은 자신을 위한 자리가 없다는 말씀이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하느님으로 가득 채워져 더 이상 자신을 위한 자리가 없다는 말씀이다.
또한 주님께서 계신 곳은 우리가 기대하거나 상상하는 곳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당신은 우리의 주도적 생각이나 바람이 단절된 곳에 계신 분이시다.
주님을 따르는 원동력은 우리의 상상력이나 기대가 아니라 바로 주님 자신이다.
따라다닐 장소(position), 지위, 신분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인 주님의 현존이 관건이다.
따름의 핵심인 주님의 현존은 미래 사항("어디로 가시든지")이 아닌 지금의 사건이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두어라."
"죽은 이들"의 일은 상징적으로 하느님을 떠난 상태의 사건들이므로, 떠난 이들에게 맡기라는 말씀이다.
하느님 나라는 죽은 일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건, 과거 일이 아니라 지금의 현존이다.
죽은 이를 위한 장례도, 산 자와의 작별 인사도, 즉 삶과 죽음 어디에도 애착 갖지 말고,
당신이 주시는 무엇, 즉 집이나 절이나, 지위나 호칭이나, 은사나 보상 등을 바라지 말고,
다만 지금 여기 현존하시는 당신만을 따르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살아있음이요, 하느님을 떠난 것이 죽음이다."(성 아우구스티노)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