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간 월 - 나도 너를 단죄하지
본문
사순 제5주간 월 -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이자들이 저를 해치려고 악의로 꾸며 낸 것들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수산나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독서)
무죄하고 힘없는 여인 수산나와 그를 무고하는 음흉하고 힘센 남자들 이야기다.
억울한 피고발자나 사악한 고발자로 이루어진 세상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하느님께서 들으시고 개입하지 않으시면 풀릴 수 없는 억울함이 넘치는 세상인데,
수산나 목소리를 들으시듯 주님께서는 억울한 이의 목소리를 듣고 계실까?
어둠의 골짜기에서 부르짖는 이 많은 세상의 목소리를 어떻게 들으실까?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복음)
여인처럼 드러나게든, 고발하는 사람들처럼 드러나지 않게든 죄를 짓는 이들이 넘치는 세상이다.
어떻게 이 죄악과 부조리한 고발과 위선적 단죄의 악순환을 멈출 것인가?
법과 정의를 내세운 엄격한 처벌로? 상황 탓으로 원인을 돌리는 범죄의 용인으로?
예수께서는 죄인과 당신을 분리하시지 않는다 - 분리는 바리사이적 태도다.
그렇다고 죄에 대해 상황을 내세워 타협을 하지도 않으신다 - 죄는 분명히 없어져야 할 악이다.
결국 예수께서는 당신이 죄인이 되시어 여인의 죄와 사악한 고발 모두를 당신 어깨에 짊어지신다.
여인이 맞을 돌을 당신이 맞으시고, 여인 대신 당신이 죽으신다.
이로써 인과응보의 사슬이 끊어지고, 나약한 본성에서 오는 죄악과 사악한 고발의 악순환이 끊어진다.
그렇게 억울한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그렇게 죄지은 이들을 대신하여 죽으실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사랑이 새 세상을 연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비참(miseria) 과 자비(misericordia)가 만났다"라고 표현한다.
비참은 여인을, 자비는 예수님을 가리킨다. (송봉모, 비참과 자비의 만남, 456-490)
비참하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 - 비참하지 않은 이에게 예수님은 필요 없다.
예수님의 자비 외에 비참을 넘어설 길이 있을까? - 자비 없는 정의는 또 다른 비참을 부를 뿐이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시편 23, 화답송)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