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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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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3주일 나해 - 이 성전을 허물어라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4-03-03 09:07   조회: 2,214회

본문

사순 제3주일 나해 - 이 성전을 허물어라


오늘 독서와 복음은 믿음의 본질과 그 본질에서 어긋난 신앙 행태를 동시에 일러준다. 첫 독서는 하느님이 십계명을 주시는 이야기다. 십계명의 본질은 계명을 누가 왜 주셨는가 하는 점에 있다. 계명을 지키기에 앞서 계명을 주신 분이 누구인지 알아야 그 뜻을 따를 수 있다. 하느님은 계명을 주시기 전에 이 점을 분명히 밝힌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그분은 생명을 지켜 주시고 해방을 주신 주님이시다. 그러기에 앞부분 세 계명(上三誡)은 나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시기에 주님만 섬기고 세상이 모두 그분에게 속함을 고백한다. 또한 세상 피조물들이 모두 그분의 작품이기에, 부모나 이웃, 말이나 행동 역시 하느님 대하듯 대하라는 명령이 뒷부분 일곱 계명이다(下七誡). 먼저 계명의 문구를 준수함으로써 하느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해방해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 하느님이 너무도 고맙고 감사하여 기꺼이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계명의 구절들을 신격화하였다.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계약궤에 담아 성전에 모시고 거기서 제사만 지내면 하느님이 들어주신다고 여기고 성전도 신격화하였다. 더 나아가 하느님이 자신들에게만 계명을 주셨다는 교만한 선민의식에 빠졌다. 그러다가 해방을 주신 하느님은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본다'(見指忘月)는 말이 있다. 겉모습에만 매달려 본질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일컫는 말이다. 계명이 손가락이라면 계명을 주신 분은 달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의 본질은 손가락에 해당하는 계명이 아니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에 해당하는 하느님, 계명을 주신 하느님이셨다.

달은 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만 집착하는 태도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논쟁을 벌이는 종교 지도자들 모습에서도 반복된다. 계명과 함께 유다인들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건물이 성전이었다. 성전은 인간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곳이었다. 세상살이에 묶이고 죄에 묶인 이들이 하느님께 나아가서 자비를 구하고 위로를 받으며 감사를 드리는 곳이었다. 성전이 손가락이라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회복이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 곧 성전의 본래 정신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하느님과의 관계는 외면한 채, 돈을 내서 제사를 지내면 죄를 용서받고 복을 받는 장소로 성전을 대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마치 동전을 넣으면 커피가 나오는 자판기처럼 제사를 지내면 복을 받는 곳으로 성전을 타락시켰다. 하느님의 선물인 생명과 해방을 이익과 흥정의 대상으로 오염시킨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를 바로잡으신다. 거룩한 분노로 채찍질하며 성전을 정화하신다. 그러자 군중은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예수님께 대든다.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파격적 대답을 하신다. 복음서는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라고 덧붙인다. 성전은 눈에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이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구원이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나 이를 보관한 성전을 통해 오지 않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뤄진다는 뜻이 담긴 말씀이다. 십계명과 성전이 가리키던 하느님은 이제 예수님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예수님이 계명을 주신 하느님이자 성전에서 기리던 하느님이시다. 예수님 스스로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라는 말씀으로 이를 확인해 주신다. 사도 바오로는 이 신비를 더욱 확대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일 뿐만 아니라,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다."(1고린토 3,16)고 일러준다.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모습은 어떠한가? 복음에서 하느님의 집인 성전 모습을 상인들이 고함을 치고 짐승들이 오가는 혼잡한 장터로 그린다. 사람들은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사고팔았다. 문화적, 심리적 상징체계에서 힘세고 저돌적인 소는 탐욕(정욕)을 상징하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양들은 부자유스러운 노예를 상징하며, 늘 구구대며 푸드덕거리는 비둘기는 분심 잡념을 상징한다(안셀름 그륀). 성전에 있다 하더라도 탐욕으로 중심을 상실한 채 안팎의 소음 속에 하느님을 찬미할 여유를 잃었다면 그곳은 시장통이다. 그 와중에 달은 못 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매달려서 우리 마음속은 소처럼 탐욕과 분노로 씩씩대며, 양 떼처럼 중심을 잃고 헤매면서, 비둘기처럼 뒷담화로 구구대며, 환전상처럼 이득 볼 궁리만 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 시장통을 어떻게 하느님의 성전으로 되돌릴 것인가?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하실 때 환전상들이 대든다. 오염된 줄 모르는 이들은 정화를 거부하고,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는 이들에게 회개하라는 말은 귀에 거슬린다. 먼저 자기 내면을 제대로 보아야 정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오염된 자신의 정화를 바란다면 예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다시 지으신 분,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분만이 성전을 정화하신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정화하신다는 믿음으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다시 보자. 그것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집착에서 떠나 달을 보는 길이다.

사도 바오로는 둘째 독서에서 이 신비를 이렇게 역설한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의 근본은 계명과 성전이 아니라 그것이 지시하는 주님과 나의 관계다. 자신을 정화하고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라고 주님은 우리를 초대하신다. 먼저 나의 모습을 살피고, 다음은 "하느님의 힘"이고 "하느님의 지혜"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시 보자. 욕심을 채우느라고 중심을 잃고 푸드덕거리는 마음의 시장통에서 해방되려면, 생명을 다시 주시기 위해 저기 저렇게 달리신 분을 보자. 저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저분이 나를 당신의 성전으로 만드신다. 저분께서 나의 주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도다." (요한 3, 16, 화답송)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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