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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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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대축일 낮 미사 - 그리고 보고 믿었다.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4-03-31 10:27   조회: 2,192회

본문

부활 대축일 낮 미사 - 그리고 보고 믿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날이다. 부활이 우리 신앙의 바탕이지만 실제로 부활을 믿기가 쉽지 않다. 부활을 믿기 어려운 것은 물리적 차원에서 부활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대다수 그리스도교인은 부활절에 하느님이 예수님의 시신을 기적적으로 변화시켜 무덤이 텅 비게 한 물리적 사건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구든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똑같은 경험을 했으리라고 예상한다. 그 자리에 우리가 비디오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 장면을 생생하게 녹화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 예상과 현실은 달랐다.

복음에서 예수님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이 치워진 것을 보자 놀라서 사도들에게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라고 알린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리적이거나 생물학적 차원에서 부활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당연한 일이다. 도대체 사흘 동안 완전히 죽었던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난다는 말인가? 

​어떻게 부활을 믿을 수 있을까? 부활은 물리적이고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선, 신앙의 진실이다. 그러기에 증명할 명제가 아니라 체험해야 할 신비다. 부활의 신비는 신앙 체험 가운데 드러나며 자라난다. 부활 신앙이 발전하는 과정을 복음은 전한다. 마리아에게 무덤을 막은 돌이 치워져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에게 달려간 베드로와 다른 제자의 반응은 의미 있는 변화 과정을 전한다.

빈 무덤 확인 과정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는 "보다"라는 동사는 우리말로는 모두 동일하게 번역되지만, 본문에서는 서로 다른 세 단어가 쓰인다. 첫째로 20장 5절에서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라는 구절에서 "보다"로 사용한 동사는 "blépei"로 '얼핏 보고 뜻을 이해한다'라는 의미다. 둘째로, 6절에서 베드로는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라는 구절에서 사용한 '보다' 동사는 "theōrêi"로 '보고 생각하는, 의문을 품고 이해하기 위해 힘쓰는 태도'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8절에서 "(그리고) 보고 믿었다."라는 구절에서 "보다 êiden"는 뜻은 '보고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즉 눈앞에 벌어진 현상을 넘어서서 그 속에 감춰진 실재를 깨닫는 단계'를 의미한다. (A. M. Canopi)

​빈 무덤을 확인하는, "보는 행위"는 이처럼 점진적인 양태로 묘사된바, 신앙인에게 부활 신앙은 고정적인 사건이 아니라 작은 시작에서 비롯하여 지속적이고 점진적으로 성숙하는 여정임을 일러준다. ​빈 무덤을 "보고 믿었다"는 말씀은 무엇을 믿었다는 뜻일까? 이 표현 뒤에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복음이 이어진다. 이를 염두에 둘 때 제자들이 믿은 것은 부활에 관한 "성경 말씀"이다. 즉 "빈 무덤을 보고 그제야 예수께서 살아서 하신 부활하리라는 말씀의 진정성과 정당성을 믿게 되었다."(H.U. von 발타사르)는 의미다. 부활 신앙은 객관적 사실의 증명에 바탕을 둔 신앙이 아니라,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신앙이다.

​믿음에 바탕을 둔 부활 체험은 사랑에서 시작한다. 처음에 빈 무덤에 놀란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되새기자 놀람은 점차 부활에 관한 말씀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변화되었다. 그러기에 그 믿음은 물리적 사실에 관한 믿음이 아니라, 살아생전 전하신 "성경 말씀"에 대한 믿음,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생전의 말씀을 반추할 때 비롯되는 믿음이었다.

​분명하고 강력하고 화려한 부활 장면을 보여주시면 부활 신앙이 더 확실해질 텐데, 어찌하여 조용히 조금씩 부활의 신비를 보게 하실까? "그분께서 조용히 행하신다는 것은 하느님의 신비다. 하느님은 인류의 장대한 역사 속에 서서히 당신의 역사를 세우신다. 인간이 되신 그분을 동시대인들과 역사의 주도적 세력가들은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는 고난받고 죽으셨으며 부활하신 분으로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당신 제자들의 믿음을 통해서만 인류에게 오시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계속해서 조용히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우리가 그분께 자신을 개방하면 그때 서서히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신다." (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

​ 하느님의 아들이 인류 구원을 위해 죽음에서 부활하셨지만, 아직도 전쟁으로 세계 곳곳에서 아이들을 비롯한 무고한 사람들이 폭격으로,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 불평등과 차별과 병고로 신음하는 이들은 늘어만 간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이 세상에서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할 수 있을까?

마더 테레사가 자신의 방에 이런 글을 걸어두었었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지만 그래도 사랑하십시오.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이기적인 동기에서 하는 거라고 비난받을 것입니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십시오.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내일은 잊힐 것입니다. 그래도 선을 행하십시오.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를 받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십시오.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하면서도 도와주면 공격할지 모릅니다. 그래도 도와주십시오. "

이 글을 예수님 부활에 비춰 이렇게 읽어본다:

 '세상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지만 그래도 사랑하십시오. 예수님의 사랑이 세상 어둠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이기적인 동기에서 하는 거라고 비난받을 것입니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십시오. 남을 위한 삶이 결코 헛일이 아님을 예수님의 부활이 증명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내일은 잊힐 것입니다. 그래도 선을 행하십시오. 세상은 우리를 잊어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결코 당신의 선행을 잊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를 받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십시오. 그토록 정직하셔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하면서도 도와주면 공격할지 모릅니다. 그래도 도와주십시오. 모든 것을 바쳐 인간을 도우신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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