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지주일 (나해) -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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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 성지주일 (나해) -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성지주일 전례의 말씀은 예루살렘 입성을 환호하는 기쁨과 수난과 죽음을 전하는 슬픔을 함께 전한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라고 사람들의 환영을 받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울부짖으며 돌아가신다. 알아듣기 힘든 신비다. 신비는 참여할 때 드러난다. 수난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습에서 내 모습을 만날 때 우리도 예수님의 수난 신비에 참여하게 된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구세주(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환영하다가 기대에 어긋나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겠다고 다짐하고도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면 외면하는 우리 모습 아닌가? 사제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고발한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손해 볼 일이 발생하면 독기를 품고 복수하는 인간들 모습이다. 유다는 스승을 배반한다. 아마도 '스승님은 이 난관을 잘 극복하실 것이다'라는 자기식의 판단을 하였으리라. 예수님을 자기식대로 판단하고 이용하는 인간 모습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다가, 주님의 눈길을 마주하며 크게 뉘우친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곤란한 상황에서는 외면하다가, 통회로 제 모습을 되찾기도 한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사형선고를 내린다. 이해관계에 따라 진실을 왜곡하는 인간 모습이다. 군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면서 채찍질과 가시관으로 조롱한다. 상대가 누구인지, 왜 그러는지 모르면서도 무시하고 조롱하며 험담하는 인간 모습이다. 그리고, 처형되시는 예수님을 멀리서 보면서 피눈물을 흘리는 성모님과 부녀자들이 있다. 삶의 질곡에서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 없이 한 맺혀 눈물짓는 이들, 좌절과 절망 속에 울부짖는 이들로 가득 찬 세상 풍경이다. 이 상황에서 나는 누구인가?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보자.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라고 외친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절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생히 옮기려는 마음에서 마르코는 그리스어로 복음을 기록하면서도 이 구절은 당시 사용한 아람어 그대로 기록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은 하느님을 부르신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은 당신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절박하게 하느님을 부르는 예수님의 외침에 수난과 죽음의 의미가 담겨있다.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외침은 하느님을 원망하는 물음이 아니라, 삶의 근본 문제를 하느님 앞에 고백하는 절규였다. 죄 없는 이들이 왜 고통을 당할까? 인간은 왜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할까? 세상은 왜 이렇게 불의가 횡행할까? 평소에 참된 행복으로 이끄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전하시던 예수님은, 이 절망스러운 물음에 답을 주지 않으셨었다. 그 대신 이 모든 질문과 안 간의 아픔을 끌어안고 하느님께 나아가서 외친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인간의 모든 고통과 절망을 목숨과 함께 하느님께 바친다. 그렇게 목숨을 바쳐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 목적이었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을 지켜보던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고 고백한다. 의아하게도 영광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숨을 거두시는 모습을 보며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 목숨을 구한다면 메시아로 믿겠다고 요구했다. 당신의 능력을 만천하에 드러내면 효과적으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러면 죽음에 지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죽음을 피해 도망가면, 죽지 않았기에 죽음을 이긴 것이 아니라 죽음보다 약해서 죽음에 진 것이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괴로워 죽을 지경”(마르 14,34)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이 잔을 거두어 주시기를 청하셨지만 결국 죽음을 겪으신다. 죽음까지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랑이 예수님이 보여준 하느님의 사랑이었다. 그럼으로써 죽음에 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죽음이 힘을 잃게 만드셨다. 죽음으로 죽음을 꺾으셨다. “그렇게” 머리를 푹 숙인 가장 철저한 패배자의 모습으로 죽음을 이기셨고 백인대장은 그 모습에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본다. 그렇게 수난과 죽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가장 결정적으로 보여 주는 순간이 되었다(안소근,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201-208 참조).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이렇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셨다.
마르코복음은 예수님이 숨을 거두신 직후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라고 전한다. 성전의 휘장은 본래 하느님의 모습을 감추던 베일이었다. 이 베일이 찢어졌다는 표현은 더 이상 하느님은 휘장 뒤에 감춰진 존재가 아니라 당신을 드러내셨다는 의미다. 목숨을 바쳐 인간을 사랑하는 외아들을 통해, 하느님은 외아들을 내주시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임이 드러난다. 사랑 안에서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가 되신다. 수난과 죽음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신비는 사랑이었다.
성주간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의 십자가로 받아들이라는 초대의 시간이다. 주님의 수난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내 모습을 보자. 더 나아가 삶이 고통스럽다면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외치신 예수님처럼, 우리의 고난과 절망을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말씀드리자. 벌거벗긴 채 매달리신 예수님처럼 우리 모든 것을 아버지께 드릴 때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의 휘장을 찢고 내 앞에 드러날 것이다. 죽음 없이 부활은 없다. 십자가의 수난 없는 부활의 영광은 없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죽음을 받아들이신 예수님처럼, 일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내려놓고 죽을 때, 아버지의 사랑이 드러나고 아버지께서 주시는 새 생명이 우리 앞에 드러날 것이다.
"구세주께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으니, 저희도 주님의 수난에 참여하여 부활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소서." (본기도)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