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나해 - 하나 됨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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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나해 - 하나 됨의 신비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 강림에 이어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낸다. '위격으로는 셋이요 본체로는 하나인 삼위일체' 교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여러 방식으로 이 교리를 설명하는데, 성경에 드러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그 신비를 헤아려보자.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체험하며, 이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무한한 존재,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존재를 체험하였다. 첫 독서에서 모세는 그러한 존재가 바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하느님이시니 그분만을 섬기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라고 명한다. 모세의 지시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자유와 해방을 주신 하느님을 섬기고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며 백성은 다시 노예로 전락하였다. 게다가 착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악인이 득세를 하는 세상을 보며, 하느님이 전능하고 정의로운 분이시면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을까? 과연 믿고 인생을 맡길 수 있는 하느님은 어디 계실까? 언제 다시 우리를 구원하실까? 하는 의문도 생겼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서 새로운 말씀을 전하셨다. 그 당시에 하느님을 섬기려면 글자대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믿어왔는데, 예수님은 법보다도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셨다. 의롭다고 자처하는 이들에게 당신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시며 사랑과 용서를 전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성전에 계시다고 믿던 사람들에게 당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이르셨다.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투쟁으로 쟁취하려고 시도하거나,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으로 고대했었는데,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다고 선포하셨다. 즉 가난한 이들, 슬퍼하는 이들 온유한 이들, 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 이미 다가온 하느님 나라는, 힘센 통치가 아니라 자비 가득한 사랑의 다스림이요, 부와 명예로 얻는 전리품이 아니라 은총과 사랑의 선물이라고 가르치셨다. 죽은 후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사람들 가운데 와 계신 하느님 나라를 말로만 선포하지 않으시고 행동으로 실천하셨다. 즉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마귀를 쫓아내시고 죄인들과 어울리며 굶주린 이들에게 빵을 주셨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분이야말로 자신들을 구원해 줄 분, 식민지 통치와 온갖 불의에서 해방시켜 신정 통치 제국의 하느님 나라를 가져올 메시아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하느님에 관해 자신들만이 알고 있고 자신들의 방식만 옳다고 생각한 종교 지도자들과, 하느님 나라가 세워지면 통치 권력을 빼앗길 것이라고 겁먹은 정치인들이 야합하여 예수님을 처형하였다. 모든 기대가 사라진 듯한 이 상황에 극적인 반전이 이뤄졌다.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날이 갈수록 부활하신 분을 보았다는 이들이 늘어갔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이 이전과는 전혀 달라진 변화였다. 예수님을 모른다며 두려워 숨고 도망 다니던 제자들이 돌변하여 두려움 없이 예수님을 증언하며 감옥이든 순교든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병자들을 돌보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며 남자든 여자든, 부자든 가난한 이든 모두 차별 없이 서로 존중하며 기쁨에 넘친 공동체를 이루어 마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처럼 변화되었다.
예수님이 누군데 그분을 믿으며 삶이 달라질까? 이런 의문을 성서 말씀에 비춰 진지하게 논구하던 이들이 해답을 발견하였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계셨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 하느님 안에 계셨구나. 예수님과 하느님은 서로가 서로 안에 계시니 한 분이구나. 하느님과 예수님이 하나인 까닭은 예수님의 영과 하느님의 영이 하나이기 때문이구나. 두 분을 하나로 엮어주는 하느님의 영이자 예수님의 영이 성령이시구나. 그분이 태초에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숨이자, 부활하신 예수님이 숨을 불어넣으시며 받으라시던 성령이구나. 그러니까 아버지 성부와 아들 성자, 그 두 분의 영이신 성령은 하나이구나. 이 진리를 한 단어로 짧게 표현한 말이 '삼위일체'였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삶이 변화된 원인은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께서 믿는 이를 예수님과 하나가 되게 하고, 하느님과도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또 다른 그리스도, 크리스천이라고 불렸다.
삼위일체는 사변적 이론이 아니라 그를 믿고 고백하는 이들을 참여시키는 신비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약속하신다. 당신이 받으셨던 하느님의 권한을 우리에게 주시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다. 생명을 창조하시는 아버지의 전능과, 인간을 구원하시는 아들의 사랑과, 이 모두를 하나로 묶어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일치는 바로 우리를 위한 선물이었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만의 하나 됨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이 이루시는 일치 안에 우리가 묶여져서 우리도 성부처럼 세상에서 창조의 삶을 살고, 성자처럼 사랑으로 서로를 구원하며, 성령처럼 서로 하나가 되어 거룩해지는 놀라운 신비다.
삼위가 일체인 신비는 우리 삶 안에서 하나 됨의 신비로 구체화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 내가 하나가 될 때, 겉의 나와 속의 나가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된다. 겉보기에 희로애락을 겪으며 생로병사를 겪는 나의 삶이 사실은 참으로 존귀한 하느님 작품임을 체험한다. 더 나아가 이웃과 내가 하나가 된다. 더불어 사는 세상 속에서 때로 미워하고 때로 야속하고 때로 그리운 이웃이나 가족과 내가 하나가 된다. 더 나아가 때로 아름답고 때로 놀랍고 때로 두려운 자연과 환경이 그것을 느끼는 나와 하나가 되어 우주의 신비가 밝혀진다. 드디어 한없이 초라해 보이던 내가 영원하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비에 우리가 참여하여 함께 춤을 추게 된다(리치드 로어, 하느님과 함께 춤을).
신앙인은 하루에도 꽤 여러 번 성호경과 영광송을 드린다. 기도 전후로, 식사 전후로, 언제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 우리도 하나로 합체됨을 되새기자.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 내가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자. 그래서 우리 삶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영광을 드리자.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