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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한다.
(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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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일 나해 -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4-06-17 09:26   조회: 1,878회

본문

연중 제11주일 나해 -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열심한 신앙인도 가끔은 신앙생활에 회의를 느낄 때가 있다. 성실하게 주일 미사에 나오고, 주어진 기도 생활에 충실하며 성경 봉독과 묵상도 하고, 이웃을 위한 봉사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왜 세상은 달라진 것이 없고, 가족들에게 힘든 일이 계속되고, 내 마음은 믿기 전과 다름없이 불안하냐고 하소연한다. 그 하소연의 바탕에는 내가 하느님께 충실했으니, 하느님도 내게 축복을 내리시어 행복하고 편안하게 해 주셔야 할 게 아니냐는 물음이 깔려있다. 일상적 관계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다.

오늘 복음의 첫 비유인 저절로 자라는 씨앗 이야기의 배경은 이 하소연과 같은 백락이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라고 이르신다. 생물학적 이치를 아는 현대인에게는 낯선 비유다. 우리 시대 농부들은 씨앗의 성장 과정을 이해하고, 성장을 촉진하거나 늦추고, 열매를 더 크거나 작게 하는 방법, 병충해를 예방하는 방법을 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농부들은 생물학적 성장 과정을 지금처럼 이해하지 못했고, 그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도 없었다. 그 상황에서 씨앗을 심은 농부는 기다려야 했다. 자고 일어나고, 낮이 되고 밤이 되는 사이에 땅은 저절로 열매를 맺었다는 예수님의 비유는, 씨앗이 성장하는 데 사람이 간섭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하느님의 창조적 힘이 그곳에 작용하고 있고, 농부가 아니고 하느님이 열매를 선사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비유 말씀이다.

이 비유는 "하느님의 나라", 즉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비유다. 비유의 핵심은 씨앗이 뿌려지기만 하면 하느님의 다스림이 저절로 온다는 데 있지 않다. 열매가 점차 익어 가듯 하느님의 다스림이 천천히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도 핵심은 아니다. 그 핵심은 인간은 하느님의 다스림이 오도록 강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봉사에도 충실했으므로 내게 하느님의 다스림을 좌우할 권리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에게 강제로 명령하거나 권리를 주장할 권한이 없다. 인간은 기다릴 뿐이고 하느님이 당신 나라를 오게 하신다(G. 로핑크). 같은 맥락에서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시든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이가 나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라고 첫 독서에서 에제키엘은 전한다. 창조적 힘과 역사적 권능은 하느님에게 있다. 하느님의 구원을 강제로 빨리 오게 하거나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느님 나라를 바라는 사람,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와 행복을 바라는 사람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을 깊이 신뢰하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이 다 알아서 다스리신다면, 굳이 충실한 신앙생활이나 봉사와 희생이 필요할까? 그저 하느님께 맡겨 드리기만 하고 우리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을까? 세상은 힘들기만 한데 다 알아서 하시는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도대체 언제 올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예수님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에 이어 겨자씨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겨자씨는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실제로 겨자씨는 2mm 미만으로 작지만 성장하면 3미터까지 자라난다. 하느님이 가져오시는 하느님 나라는 지금 보기에 아주 작은 일이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상상하기 힘든 큰 나무로 성장한다는 말씀이다. 성서 전반에서 하느님은 언제나 작은 이들을 통해 큰일을 하신다. 인류 구원을 위하여 강대국이 아닌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기 위해 건장한 형들 대신 막내였던 소년 다윗을 선택하시고,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놀라운 사건을 위해 나자렛 시골 처녀 마리아를 선택하시고,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할 제자로 많이 배우지 못하고 재산도 없는 갈릴래아 어부들을 선택하셨다.

 작은 이를 통해 큰일을 이루시는 하느님 나라는 우리를 통해 우리 안에서 시작된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부족하여 쓸모없다는 생각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나"라는 존재가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이더라도 겨자씨처럼 그 안에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현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담겨있다. 겉보기에 부당하고 보잘것없고 작기만 하지만, 내 안에 하느님의 씨앗, 하느님의 생명을 담고 있기에 내가 당신의 희망이라는 놀랍고도 기쁜 소식이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는 말씀은 나 자신뿐 아니라, 내가 만나는 이웃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험해도, 우리 눈에 상대방이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이더라도, 이웃 안에도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심겨 있음을 믿고 그 씨앗이 자라나기를 희망하며 서로 격려하라는 말씀이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담겨있고, 그 씨는 우리도 모르는 새 조금씩 자라난다. 땅에 떨어진 씨앗은 즉시 결실을 거둘 수 없다. 열매를 맺으려면 침묵과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삶에서 지루하게 느껴지는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는" 시간은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다. 하느님의 현존이 자라나는 섭리의 시간이다. 이 시간에는 가뭄이나 장마나 폭풍우도 닥쳐온다. 삶에도 가뭄과 폭풍이 있다. 누구도 나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고 하느님도 침묵하시는 듯한 힘든 시간이다. "추수 때"에 이르러서야 이 침묵의 시기, 죽음의 시간도 결실에 필요한 은총의 시간이었음을 깨닫는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십자가상에서 하느님의 침묵, 버려진 듯 보이는 죽음의 시간을 거쳐 부활하셨다. 하느님의 침묵 앞에 원망이나 갑갑함을 느끼고, 노력한 결실이 보이지 않을 때 불안해진다. 바로 그때 하느님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지금은 작아 보여도 하느님의 현존은 우리 안에 점차 성장한다는 믿음을 새롭게 할 때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는 둘째 독서에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라고 전한다. 부족한 내 안에 겨자씨처럼 작지만, 하느님의 씨앗이 심겨 있음을 확신할 때 하느님 나라는 내 안에서 자라고, 하느님이 완성하실 것이다. 또한 내가 만나는 작은 이들 속에도 하느님을 향한 생명이 담겼음을 신뢰할 때 하느님 나라는 그 작은 이 안에서 자라난다. 그렇게 나와 너 모두 안에 하느님의 씨앗이 심겨 있음을 믿을 때,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주님의 기도에서 늘 기도하듯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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