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4주일 나해 -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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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4주일 나해 -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오늘 복음은 대단히 역동적이다. 베드로는 사도들의 으뜸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지만, 뒤이어 사탄으로의 추락한다. 말씀 이해를 위해 사건이 벌어진 “카이사리아 필리피”라는 지역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카이사리아”란 로마의 황제(카이저)를 기리는 도시로 로마제국 내에는 카이사리아 팔레스티나, 카이사리아 카파도키아, 카이사리아 필리피 등이 있었다. 황제의 도시는 황제가 추구하던 로마 제국의 상징으로, 작은 도읍이 아니라, 힘과 지식과 관능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제국의 경제력을 드러내는 위엄에 넘친 신전이 있고, 세상을 지배할 지식을 위한 도서관이 있고, 남성과 여성의 관능적 조각상이 넘쳤다.
힘과 지식과 관능이 넘치며 투쟁하던 황제의 도시 한가운데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색이 어떠했을까? 초라한 식민지 시골 갈릴래아 출신의 어부들인 그들은 황제의 도시에 어울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주눅이 들었을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물으신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라고 답한다. 그 대답에는 '예수님, 당신은 황제의 도시에서 위용을 자랑하는 신전의 신이 아닙니다. 지성이나 예술이나 힘의 결정체인 황제도 아닙니다. 사람들의 눈에 당신은 그저 로마 식민지 치하의 궁핍한 유다인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처럼 초라하게 보입니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예수님은 다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리스도란 머리에 기름을 부음으로서 왕으로 축성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베드로의 대답은 '사람들에게는 당신이 신도 황제도 아닌 초라한 유다인 예언자로 보일지라도, 내게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이 기름을 부으시어 세운 왕이오 나의 구원자십니다.'라는 고백이다. 예수님이 황제보다 높은 분이라는 이 고백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스승께 드리는 최고의 고백이었다.
이 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당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라고 수난을 예고하신다. 투쟁을 통해 힘센 이가 승리하는 황제의 길이나 세상의 방법과는 전혀 다른 하느님의 구원 방법의 예고다. 권력을 누리는 왕이 아니라 고난을 받는 종의 길,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영웅이 아니라 배척을 받는 죄인의 길, 풍요롭고 호사스러운 길이 아니라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는 가난과 희생의 길이 당신께서 가실 길임을 선언하신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라고 성경은 이어진다. 여기서 "반박하다"라는 동사는 “꾸짖어 충고한다"라는 뜻이다. 베드로가 멱살을 잡듯 예수님을 붙들고 꾸짖는다: '왜 죽을 생각을 하느냐, 정신 차리자. 당신은 힘센 왕이 되시고, 그래서 우리 함께 잘 살아 보자.' 그러자 예수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일갈하신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하셨다고 복음은 전한다. 베드로만 아니라 제자들 모두에게, 주님을 따르는 이들 모두에게 하신 말씀이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는 구절은 “너의 생각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속한 생각이다”라는 뜻이다. 하느님에게 속한 생각, 즉 목숨까지 내어 주는 사랑을 거부하고, 인간에게 속한 생각 즉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순간이 베드로가 사탄으로 추락하는 순간이었다. 신앙을 이용하여 어떻게 해서든 현실적인 이익을 챙기려는 마음을 품고 있다면 우리가 사탄이라는 말씀이자, 인간의 생각에서 하느님의 생각으로 눈을 돌리라는 초대의 말씀이다.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믿고 있나? 힘이 세어 악한 사람들을 혼내주시는 예수님? 능력이 출중하여 복잡한 집안 문제, 나라 문제를 단숨에 해결하는 예수님? 병든 이들은 고쳐주고, 궁핍한 이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시며, 세상사를 마음먹은 대로 다 이루어 주시는 도깨비방망이 같은 예수님? 이런 예수님을 믿어 개인적 이득을 보려 한다면 베드로처럼 사탄이 된다. 예수님은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라고 하신 첫 독서 말씀대로, “고난을 받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심”으로 왕이 되셨다.
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나의 주님으로 모시는 길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갈 때 가능하다. 그러기에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라고 야고보 사도는 힘주어 전한다(제2독서). 믿음은 신경에서 고백하듯 credo in 즉 주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 주님에게 온전히 귀의(歸依)하는 것(로완 윌리엄스)을 말한다. 자신의 의지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주님께 종속시키는 것이 신앙이다. 그러한 의지의 종속은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행위다 자신을 버리는 희생에는 고통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실천이 진정한 믿음이자 살아있는 믿음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입으로만 고백하는 이들이 아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은총을 받아 소원을 성취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예수께서 이르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당신을 따르려면 당신의 운명에 동참하라는 말씀이다. 십자가를 피하고 고통을 피하는 신앙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고통을 통하여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지 말고,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고 자기를 버리는 죽음을 통해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이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승리의 메시아, 곧 고통을 회피하고 죽음을 외면하며 자기의 이득만을 보장하는 메시아는 거짓 메시아다. 거짓 메시아를 믿는 것은 거짓 신앙이다. 거짓 신앙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진정한 메시아가 이루는 구원은 고통과 죽음을 통해 이뤄지기에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