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일 나해 -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본문
연중 제22주일 나해 -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모든 종교에는 지켜야 할 계명이 있다. 첫 독서(신명기)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계명의 근간인 율법을 전하는 이야기다. 모세는 계명을 전한 후,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 있느냐?"라고 장엄하게 선포한다. 하느님이 계명에 우선한다는 선언이다. 계명을 지킬 이유는 하느님을 섬기기 위함이다. 계명은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며, 하느님께 나아가는 방편이었다. 그런데 차차 주객이 전도되어 방편이 목적이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복음도 계명과 관련된 이야기다. 식사 전에 손 씻는 계명 위반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이스라엘 지역은 먼지가 많은 곳이기에 위생상 자주 씻어야 했고, 특히 식사 전에는 손과 그릇을 씻었다.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잘 보존하기 위해 손과 그릇을 씻는 계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라고 비난한다. 하느님이 만드신 사람의 생명이 귀해서 손을 씻는 법이 있었는데, 주객이 전도되어 손을 안 씻었다고 하느님의 피조물인 사람을 비난하고 차별하며 무시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법규나 계명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을 드러내고, 우리가 건강하길 바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지키는 “울타리”였다. 그런데 울타리를 통해 하느님을 드러내지 못하고, 울타리 자체를 더 중시하는 모습으로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계명을 지켜야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오해하여, 하느님은 잊어버리고 계명의 글자에만 매달리는 어리석음은 복음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뿐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곳에 있어왔다. 어떻게 이 어리석음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계명의 뜻을 잊은 채 문자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이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이르신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레위기를 비롯한 모세오경 전반에 드러나는 성화법의 핵심은 하느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룩함의 반대는 더러움이다. 그런데 사람을 더럽히는 것, 즉 거룩하지 못하게, 하느님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외적인 계명이나 관습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우리 내면의 자세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하느님의 자비를 가르치시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일러주신 예수님.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모든 것이었다. 따라서 계명이나 율법도 하느님에 비추어 볼 때만 의미를 지닌다. 그렇듯 모세를 통해 전해진 계명은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을 드러내는 길이었다. 거룩함에 관한 계명을 준수하면 하느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거룩하시니 그 백성인 우리도 거룩해야 하고 그래서 계명을 따른다. 거룩하신 하느님은 외면한 채, "사람에게서 나온 것"인 관습이나 전통이나 율법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럽힐 수 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신다. 실제로 기득권이 가진 이들이, 대대로 지켜온 사회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하느님과는 무관한 갖가지 관습이나 계명들을 강요해서, 사람들을 더럽히고 괴롭혀온 역사적 사실들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이 어리석음을 벗어나 하느님께 돌아서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내 삶의 바탕이 하느님인지, 참으로 내가 하느님의 백성으로, 하느님의 아들딸로 스스로를 의식하고 있는지, 나에게서 나오는 말과 행동이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처신인지 살펴야 한다.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라는 생각 없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의향도 없는 채로, 아무리 하느님이 주신 계명을 준수하고 교회의 규정들을 지킨다 하더라도 우리가 행하는 말과 행동은 거룩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 백성이 되지 못하고 하느님 나라에 속하지도 않는다.
하느님께 돌아서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게 된다. 야고보 사도는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라고 둘째 독서에서 전한다.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은 우리를 더럽히지만, "위에서", 곧 하늘에서 오는 은사는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끄는 선물이라는 말씀이다. 그 은사는 하느님의 말씀에 담겨있고, 우리를 구원하는 놀라운 힘이다.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로 얽히고설켜 서로 싸우는 소리로 시끄럽다. 계명과 율법은 변질되고 신앙조차 인간적 욕망의 성취 수단이 되어 버린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명기 말씀대로 단 한순간도 하느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셨다. 탐욕스러운 자기 안에서 나오는 변질된 신앙과 그릇된 계명 속에 허우적대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가까이 다가오시고, 더 나아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고, 목숨을 내어 주신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온전한 드러나심이다, 따라서 우리의 진정한 율법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이 놀라운 신비를 전하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거듭 마음에 새기자.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제2독서)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