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1주일 나해 -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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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1주일 나해 -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오늘 복음은 지난 다섯 주 동안 이어진, 빵을 많게 하신 표징에 관한 담론의 결론 부분이다. 생명의 빵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투덜거리며 예수님을 떠나기 시작한다. 그러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신다. 이 물음에 오늘 복음 전체의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다.
사람들은 빵도 먹여주고 병도 고쳐주시는 예수님을 왜 떠났을까? 빵의 기적을 행하신 다음 예수님은 빵의 의미에 관해 긴 말씀을 들려주셨다. 당신은 하늘에 올라갈 것이고 그러한 당신을 우리는 먹어야 하고, 당신은 영적인 분이고 육적인 것은 쓸모가 없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셔야 우리도 당신을 따르고 등등, 신앙 없이는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이다. 자기 기준으로 상식 밖이라고 판단하자, 주님의 말씀이 거북스럽게 들렸을 것이고, 그렇게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난다.
주님의 말씀이 왜 귀에 거슬릴까? 사람들은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편하고 좋은 말을 듣고 싶어 한다. 남의 말이 자신의 기대와 사고력, 자신의 경험에 어긋나면 귀에 거슬린다.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듣기 좋고 편안한 말씀만 받아들이려 한다. 말씀이 불편하고 이해하기 힘들면 투덜대다가 떠나간다. 모든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1코린 1, 23)라고 바오로는 전한다. 현대 교회, 특히 한국 교회의 문제로, 대중의 기대치에 야합하여 복음을 싸구려로 매도해버리는 현상을 지적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즉 사람들이 떠나서 신자가 줄지 않도록, 복음을 사람들 입맛에 맞게 안일하고 손쉬운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교회 현실 비판이다.
예수님을 떠나는 이유는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구절에 담겨있다. 여기서 "듣다"라는 그리스어 아쿠에인ἀκούειν은 '듣고 동의하다, 경청하다'는 뜻과 더불어 "순종하다"는 의미도 지닌다. 예수님의 말씀이 듣기 거북하다는 말은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순종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말씀을 들음은 그 말씀을 받아들여 순종하는 것이다. 말씀에의 순종은 말씀은 우리와 하나로 만든다. 영원한 생명이신 말씀과 우리가 하나가 되면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바오로 사도는 둘째 독서에서 순종을 통한 하나됨의 길을 일러준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말씀을 받아들여 순종하는 예식을 제1독서는 계약의 형태로 제시한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에 이르는 긴 여정을 마무리하며 계약을 갱신한다. 계약의 핵심은 그들을 해방시키신 주님과, 주변의 신들 중 "누구를 섬길 것인지" 선택에 있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라고 사람들은 고백한다. 복음에서 말씀에 순종을 거부하고 떠나는 이들을 보며 주님이 제자들에게 던지신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라는 질문이나,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라는 여호수아의 명이나 모두 오늘 우리에게 선택과 결단을 촉구하시는 말씀이다. 이 선택은 회피할 수 없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과 결단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주님을 섬기겠다는 선택에 대해 이스라엘은 역사를 통해 책임을 져야 했다.
미국 두 젊은이가 시골 삶이 따분하고 지루해서 돌아오는 일요일은 화끈하게 지내자고 약속을 하였다. 그 계획은 도박이었다. 주일날 두 청년은 도박장으로 가다가, 교회를 지나치게 되었다. 한 청년은 예수님 상을 보는 순간 발이 얼어붙어 도박장을 포기하고 교회로 들어갔다. 다른 청년은 계획대로 도박장으로 갔다. 30년이 지난 후, 교회로 들어간 청년은 미국의 22대 대통령(그로버 클리블랜드)으로 취임을 한다. 도박장으로 향한 청년은 감옥에서 그 친구의 취임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참된 믿음은 자신을 버리고 주님을 택하는 행위다. 그 선택은 포기를 동반한다. 자기를 재미있게 해 주는 것으로 여기던 길을 포기하지 않고는 주님을 선택할 수 없다. 자신의 선입견과 집착 자신의 편의, 경험, 지식에 의존하던 삶을 포기하지 않고는 순종하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자신과 하느님, 자기의 이익과 주님의 뜻을, 양다리 걸치듯 함께 취할 수는 없다. 자신을 포기하고, 주님께 순종할 때 주님이 영원한 생명의 빵이 되신다.
우리는 첫 독서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주님을 섬기겠다"고 결단을 내려 신앙을 고백하였다. 복음에서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신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처럼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즉 우리는 세례 때 마귀를 끊어버리고 주님을 믿는다고 "예" 하는 결단을 내렸다. 성체를 모시면서 "그리스도의 몸" 앞에 "아멘" 하고 우리가 선택한 신앙을 고백한다. 그 선택은 형식적인 답변이 아니다.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발길을 돌리거나, 내게 이득이 없다고 취소하거나, 지금 급한 사정이 생겼다고 잠시 유보할 수 있는 결단이 아니다.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결단이자, 하루하루를 걸쳐 온 생애에 책임이 따르는 우리의 선언으로, 늘 새롭게 반복할 결단이다.
구약에서 이집트를 탈출하는 여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반항하였듯, 신약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렵다고 투덜대며 사람들이 떠났듯, 지금 우리 안에서도 여러 수군거림이 들려올 수 있다. 신앙의 여정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과 납득할 수 없는 처사들을 보며, '이래서야 어찌 믿겠는가? 어찌 이런 일이 나에게 닥치나? 이렇게 믿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불평불만이 내면에서 들리는 때가 있다. 바로 그때가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라고 물으시는 예수님을 마주할 순간이다. 지신을 내려놓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결단을 말씀드리는 순간이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 대답은 자신을 포기하고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선언이다. 베드로의 마음으로 우리도 고백하자: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