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회원가입  |   로그인  |   오시는 길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한다.
(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말씀의 숲
영성의 향기 말씀의 향기 수도원 풍경 세상.교회의 풍경 기도자리
말씀의 향기

연중 제26주일 나해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4-09-29 10:54   조회: 1,410회

본문

연중 제26주일 나해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가 겪는 갈등의 원인으로 편가르기를 꼽는 이들이 많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편가르기 문제를 다룬다. 첫 독서에서 모세와 70명의 장로들이 하느님의 영을 받으러 성막으로 갔는데, 함께 가지 않고 진중에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의 영이 내렸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그들을 제제하자고 모세에게 건의한다. 우리 편이 아니니 내치자는 것이다.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들만 기적을 행하는 줄 알았는데, 자기들 이외의 사람들이 예수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자 이를 막으려고 시도한다. 우리 편이 아니니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사람들이 편을 갈라 우리 편은 잘못해도 봐주고, 반대편에 대해서는 옳은 말을 해도 무조건 틀렸다는 식의 편가르기가 지금도 만연하다. 좌파 우파, 야당 여당 등 정파적 분열은 물론이고 지연, 혈연 학연에 따라 편가르기나 자기만 옳다는 풍토가 대세다. 심지어 종교 분야까지 천주교는 마리아교라고 폄훼하거나, 부처 믿으면 지옥 간다는 등 일탈 현상이 나타난다.

 

편가르기가 왜 해로울까? 우리끼리 잘 살겠다는데 뭐가 문제인가? 진리를 가리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 편가르기(splitting)는 자아가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 자신과 대상을 온전한 개체로, 한 인간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좋은 부분과 나쁜 부분으로만 보는 현상을 말한다. 즉 편가르기는 어린 시절 철없는 아이들이나 하던 짓인데, 어른이 되어서도 내 편 네 편 따지는 원인은 미성숙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전체로 보지 못하고 좋은 부분 나쁜 부분으로 편을 가르면 독선과 편견에 빠진다. 그렇게 눈이 멀어 보고 싶은 것만 보면 진실을 볼 수 없고, 정신의 자유를 상실한 채 자기도 모르게 상식 밖의 모습으로 추락하게 된다. 그 결과 내 편은 무조건 옮고, 상대 편은 무조건 틀리다는 이분법적 사고의 노예가 된다.

 

편가르기를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보실까? 첫 독서에서 자신들과 함께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을 받을 이들을 제재하자는 여호수아의 편가르기 주장에 모세는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하고 꾸짖는다. 복음에서 자기편이 아니면서도 예수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이들을 막으려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막지 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모두를 포용하시는 하느님의 큰마음을 보여주신다.

 

인간의 편가르기와 달리 하느님은 자유롭기만 하다. 바람이 자기가 불고 싶은 대로 불듯, 하느님의 영은 원하시는 대로 움직이신다. 편가르기는 자유롭고 너그럽게 모두를 품어 주시는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큰 장애물이다. 정파나 출신에 따라 편을 가르고, 울타리를 치고, 자기들만 옳고 상대는 제거할 악으로 간주하는 이분법은 하느님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

 

현실적으로 어떻게 정치 성향, 인종, 빈부, 남녀 등의 문제에 의견이 다른 사람을 편가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스캇 솔즈는 "선에 갇힌 인간, 선 밖의 예수"라는 책에서 편가르기를 넘어서는 것을 선 밖으로 나가는 여행이라며 예수님과 함께 이 선을 넘어설 제안을 한다. 그러기 위해 새로운 관점과 시각이 필요하다. 편을 가르는 세계관,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닌 성경적 세계관이 필요하다. 인간은 내편 네 편의 선에 갇혀 있지만, 주님은 진리와 자유로 선 밖에 계신다. 신앙인은 편을 가르는 선을 뛰어넘기 위해 그는 예수님이 우리의 편이신가 묻지 말고, 우리가 그분의 편인가를 자문해 보라!”고 제안한다. 자신이 중심이 되어 주님까지 자기 편을 만들려 하는 신앙은 편가르기의 감옥에 우리를 묶어 두지만, 주님의 중심이 되어 내가 주님 편이 되면 편가르기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주님과 함께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야가 열린다.

 

하느님 눈에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능력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있는 사람 없는 사람, 경상도 사람 전라도 사람, 미국 사람 동남아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당신의 소중한 자녀일 뿐이다. 그 소중한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가 서로 편갈라 차별하고 자기만 잘났다고 다른 편을 무시한다면 아버지 마음이 어떻겠나? 둘째 독서에서 야고보는 자기들만 잘 살려고 하는 독선적인 부자들에게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하고 엄중하게 경고한다.

 

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뿐 아니라, 편을 갈라 자신만 옳다는 독선에 빠진 사람이기도 하다. 주님은 결코 편가르기를 일삼는 소인배가 아니다. 오히려 편을 갈라 놓은 담을 허물고, 독선에 눈먼 인간의 자유를 진리로 이끌어,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기를 바라신다. 명심할 점은 우리가 편가르기를 일삼는다면 우리 편이 더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눈이 멀어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리는 불행이 초래된다는 점이다. 자신과 다르다고 남을 미워한다면 자신뿐만 아니고 남을 죄짓게 할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오늘 말씀 끝에 남을 죄짓게 하느니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라고 하시며, "손이든 발이든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리고, 눈이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하고 혹독하게 들리는 말씀을 하신다. 말씀대로 할 경우 자신을 돌아보면 성하게 남아있을 부분이 없을 것 같다. 실제로 죄를 지었지만 회심하는 이들에게 단 한차례도 눈을 뽑거나 손을 자르라고 요구를 하신 적이 없는 분이 어찌 이렇게 험하고 극단적인 말씀을 하실까?

 

손발 자르고, 두 눈 빼 버리고서라도 지켜야 할 가치 때문이다. 그 가치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졌기에 하느님을 닮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무슨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그 존엄성을 지키라고 그리도 모질게 표현하신다. 예수님은 손발을 잘라서가 아니라, 두 눈을 뽑아서가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 당신의 목숨 내어주어 우리를,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를 지키셨다, 험하게 들리는 주님의 말씀은 바로 당신 이야기,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이야기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내편 네 편 편가르는 가운데 제 잘난 맛에 어둠 속에 살 것인가? 손발 자르듯, 두 눈 뽑듯 편견과 독선을 뽑아버리고 "생명을 누리라", "하느님 나라의 자유와 기쁨을 누리라"고 초대하시는 말씀에 응답할 것인가?

 

[출처] 말씀에

 

해뜨는 마을 l 영보자애원 l 영보 정신요양원 l 천안노인종합복지관
교황청 l 바티칸 뉴스 lCBCK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 천주교 여자수도회 l 한국 천주교 주소록 l 수원교구
우. 13827 경기 과천시 문원청계길 56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56 MunwonCheonggyegill Gwachon-si Gyeonggi-do TEL : 02-502-3166   FAX : 02-502-8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