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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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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4주일 가해 -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5-12-23 10:02   조회: 31회

본문

대림 제4주일 가해 -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대림 제4주일인 오늘, 첫 독서는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전한다. 복음은 이 예언이 요셉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임으로써 성취되었음을 전한다. 기원전 6세기에 선포된 예언이 기원 원년에 실현된 이 사건은 오늘 우리의 삶 안에서 강생이 다시 이루어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성찰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이 선포된 배경은 기원전 733년, 유다 왕국이 주변 강대국들의 협공을 받던 위기의 시기이다. 유다 임금 아하즈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강대국 아시리아와 군사 동맹을 맺으려 한다. 이에 예언자 이사야는 왕에게, 나라의 운명을 정치·군사·외교적 계산으로만 해결하려 하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라고 충언한다. 그러나 아하즈는 “어떻게 하느님을 시험할 수 있는가?”라고 말하며 이를 거절한다. 이는 겉으로는 겸손한 태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는 변명에 불과하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하느님의 개입으로 자신의 권력이 약화될까 두려워하며, 하느님을 성전 안에만 모셔 두려는 교만이 그 밑바탕에 자리하고 있다. 이에 이사야는 “젊은 여인(동정녀)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라고 예언한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처녀의 출산이 하느님께는 가능하듯이,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오셔서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을 해결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세상과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아하즈 왕처럼 '하느님이 어떻게 내 일상 속에 들어오시겠는가? 매일 먹고 자고, 일하고 지치고, 늙고 병들고, 기쁘고 속상한 일상에 어떻게 하느님이 들어오시겠는가?' 하며 겸손을 가장하여 하느님의 개입을 은근히 거부한다. 그러한 태도의 이면에는 아하즈의 변명처럼, '내 삶에 벌어지는 일들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하느님은 내 인생에 간섭하시지 말고 내가 필요할 때만 오시면 됩니다. 내가 부를 때까지 그냥 성전 안에서 찬미를 받으시며 가만히 머물러 계십시오' 하는 교만이 숨겨져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 이러한 불신과 교만을 넘어 임마누엘,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살아내기 위해 복음 속 요셉을 바라본다. 요셉은 함께 산 적도 없는 약혼녀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파혼을 결심한다. 복음은 그가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아브라함 이래 성경에서 말하는 의로움이란 “성경에 따른 온전한 삶”을 의미한다. 시편 1편은 의인을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이라고 묘사한다. 그는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자기 존재의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은” 사람이다. 이렇게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예레 17,7) 하느님을 신뢰하며 그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의로운 사람 요셉은 하느님의 메시지를 듣는다. (베네딕토 16세)


​하느님의 메시지는 요셉의 꿈을 통해 전해진다. 천사는 마리아의 임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그 아기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알린다. 이해하기 어려운 꿈속의 말씀을 "의로운 사람" 요셉은 받아들이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다. 이로써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는 예언이 성취된다.


​여기서 핵심은 ‘받아들임’이다. 요셉이 꿈속의 지시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을 때,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신비가 실현되었다. 우리 삶에서도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들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E. 퀴블러 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삶에서 닥치는 어려움은 나쁜 것도 아니고, 그 이유를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삶은 우리에게 겸허함을 요구한다. 삶은 신비이며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여기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싸움을 멈추는 것, 줄다리기 게임을 멈추는 것, 줄을 내려놓는 것, 우리의 방식을 내려놓는 것이다. 불가능한 상황을 통제하려 들지 말고, 내가 옳고 저 사람은 틀렸으니 고쳐 주어야 한다는 생각까지 내려놓는 것, 그리고 ‘당신의 뜻대로’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향해 깨어있으며 하느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던 의로운 요셉이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였듯, 우리가 우리 삶의 신비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때, 그 속에 담긴 하느님의 섭리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현실에서는 많은 이들이 어떻게든 이겨 보려고 목소리를 높이고 줄다리기를 하며 싸우지만, 결국 헛된 힘만 쓰고 지칠 뿐이다. 반대로 줄을 내려놓고 “당신의 뜻대로”라고 말하며 상대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 또한 받아들이게 된다. 자존심과 고집 때문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결국 스스로를 집착에 묶어 괴로움 속에 가두게 된다. 그러나 자존심과 고집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며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때, 참된 자유가 찾아온다.


​ 내가 옳고 상대방이 틀리다며 이를 가르치고 바로잡으려고 언제나 큰소리치는 이들도 있는데, 그 결과는 대개 갈등과 혐오만 남는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분노와 상처만 깊어질 뿐이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나와 다른 상대를 존중하며 받아들이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참된 지혜다. 


​“인간에 관한 신기한 역설은 내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내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칼 로저스 ) 우리는 상대방뿐 아니라 현실 앞에 무력한 자기 자신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받아들임은 "체념하는 것이나 방종, 혹은 수동적인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세상과 자신에게 깨어 있고, 하느님과 이웃에게 열려 있는 가운데 자신이 변화되는 신비다."(타라 브랙) 


​요셉과 마리아는 하느님의 섭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임마누엘이 이루어졌다. 우리 삶 안에서 하느님의 이끄심을 받아들일 때, 나를 위해 태어나시는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된다. 동시에 새롭게 태어나는 자신의 모습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 자리에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신비가 오늘 우리의 삶 안에서 실현된다.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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