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회원가입  |   로그인  |   오시는 길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한다.
(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말씀의 숲
영성의 향기 말씀의 향기 수도원 풍경 세상.교회의 풍경 기도자리
말씀의 향기

연중 제28주일 다해 –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5-10-13 14:59   조회: 164회

본문

연중 제28주일 다해 –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오늘 제1독서는 엘리사 예언자가 시리아의 나병 환자를 치유한 이야기를 전하고, 복음은 예수님이 열 명의 나병 환자를 고쳐주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나병은 전염을 막기 위해 가정과 사회로부터 철저히 격리되던 불치병이었습니다. 병의 고통보다 더 큰 것은 사람들과 단절된 외로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병을 ‘하늘이 내린 형벌’, 곧 '천형(天刑)'이라고 불렀습니다.


복음에 보면, 나병 환자 열 명이 멀찍이서 소리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말씀하십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 시대에는, 사제가 병이 나았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해야 그 사람이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기적이 일어난 뒤에 벌어진 사건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아홉은 어디로 갔을까요?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성서학자들은 돌아온 이가 사마리아인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돌아오지 않은 아홉은 유다인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께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부심으로, 은총조차 당연한 권리로 여겼을 것입니다. 자비를 구할 때는 간절했지만, 그 은혜를 받자 예수님은 더 이상 그들의 마음에 없었습니다. 종교를 특권으로 여기고, 기도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지요.


​오늘날도 상황은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의 본뜻은, 부족하고 연약한 인간이 겸손하게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종교를 특권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나 자신의 종교만이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지요. 이들의 기도에는 하느님의 뜻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 이익만을 구할 뿐입니다. 결국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과 재물, 권력을 섬기는 우상숭배로 빠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좋지만, 그리스도교는 싫다.”(M. 간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갑니다. 신앙을 ‘안전한 보증서’로 여기고, 기도를 자기 바람을 이루는 도구로 삼는 태도, 그것이 바로 복음에 나오는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 사람의 모습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왜 그토록 중요할까요? 감사드리지 못한 아홉 명은 결국 주님과의 관계를 맺지 못했습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없다면, 병이 나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결국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채 또 다른 병으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돌아온 사마리아인은 달랐습니다. 그는 단순한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에게 자비를 베푸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감사드리기 위해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처럼 그의 감사는 단순한 치유의 기쁨을 넘어 영원한 생명의 은총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감사드릴 수 있을까요? 사마리아 사람의 태도에 그 답이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루카 복음에서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말은 하느님의 현현, 곧 신적인 기적을 본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뜻합니다. 그는 단순히 깨끗해진 피부만 본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신 하느님을 보고, 그분을 찬양하며 감사드렸던 것이지요.


감사는 ‘다시 아는 행위’입니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던 나의 삶, 가족, 이웃, 그리고 내게 일어난 사건들을 다시 바라보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새롭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관계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다시 아는 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삶에는 기쁨과 슬픔이 있고, 보람과 허전함도 있습니다. 때로는 행복에 젖기도 하지만, 때로는 버려진 듯한 외로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을 다시 보고, 그 속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할 때, 감사의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미사의 다른 이름은 ‘감사제’입니다. 미사 때마다 우리는 감사송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주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직역하면 의무)요 구원의 길입니다.” 삶의 여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아는 감사가 인간의 도리이자 우리의 의무이며, 그 감사가 구원의 샘이라는 고백입니다.


​복음의 사마리아인을 묵상하다 보면 호주의 장애인 닉 부이치치(Nick Vujicic)가 떠오릅니다. 그의 아버지는 팔과 다리가 없이 태어난 아들을 보고 충격으로 병실 밖으로 뛰쳐나가 구토를 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닉이 태어난 지 넉 달이 지나서야 그를 품에 안았습니다. 닉 역시 절망 속에 여러 차례 스스로 생을 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열다섯 살 무렵, 그는 성경에서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두고 제자들이 "누구 죄로 저 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 1-3)라고 하신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때 닉은 자신의 장애가,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하느님의 섭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닉은 희망을 전하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팔과 다리는 없지만, 그는 결혼해 자녀를 두었고, 골프를 치며, 수영을 합니다. 목사이자 음악가, 배우로서 전 세계 40여 개국을 돌며 희망과 믿음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감사가 그를 완전히 새롭게 한 것입니다.


​삶은 언제나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병든 나병환자처럼 마음이 문드러지기도 하고, 때로는 무기력에 눌려 손발이 묶인 듯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다시 보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 너머, 우리 곁에 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외침을 들으시고, 우리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그분을 보고, 그분을 찬양하며, 그분께 돌아와 감사드리는 믿음, 그 믿음이 바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출처] 말씀에

해뜨는 마을 l 영보자애원 l 영보 정신요양원 l 천안노인종합복지관
교황청 l 바티칸 뉴스 lCBCK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 천주교 여자수도회 l 한국 천주교 주소록 l 수원교구
우. 13827 경기 과천시 문원청계길 56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56 MunwonCheonggyegill Gwachon-si Gyeonggi-do TEL : 02-502-3166   FAX : 02-502-8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