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간 목 -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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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5주간 목 -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복음)
사는 것은 고통의 바다라던가?
삶과 죽음에 관해 끊이지 않는 동서고금의 성찰과 견해는 다름 아닌
어떻게 이 삶의 수고와 피곤함에서 벗어날 것인가? 하는 물음과 제안들이다.
그런데 안식을 주시겠다니 눈이 번쩍 뜨이는 제안인데, 어떤 안식일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안식을 얻기 위해 다시 멍에를 메라고?
삶의 무게에 짓눌리는 이에게, 멍에를 더하는 것이 어떻게 안식을 얻는 길일까?
목숨이 있는 한 멍에는 없어질 수 없다. 인간 됨의 조건이 그렇다.
그러나 어떤 멍에를 멜 것인지 선택은 가능하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이르신다.
예수님 당시 유다인에게 멍에는 율법과 그를 세부적으로 규정한
율법학자들의 이론과 바리사이들의 실천을 가리켰다.
그 멍에는 결국 법을 준수하여 인간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려는 태도로 변질되었다.
이 태도는 삶의 피로와 절망을 더할 뿐 해방은 요원했다.
율법의 멍에를 지고 자신의 힘으로 해방과 구원의 의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멍에란 삶의 한숨과 피로, 고통의 의미를 율법이 아닌 예수님 안에서 발견하는 태도다.
당신은 삶의 고통과 죽음을 넘어선 분이시기에 내 삶과 죽음에 궁극적 의미를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부활의 빛에 비춰서 내 삶을 다시 보는 당신의 멍에는 정녕 편하고 가볍다는 말씀으로 들린다.
생명의 충만을 당신 안에서 보게 하는 멍에를 메고 살라는 초대를 듣는다.
"나는 있는 나다(EGO SUM EGO). ....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독서)
모세에게 주신 하느님의 자기 계시('나는 있는 나')는 신비로운 말씀으로 다양하게 해석된다.
- '나는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없다(말하고 싶지 않다).' 하느님은 말속에 가둬둘 수 없기 때문이다.
- '존재하지 않는(이사 43, 10), 아무것도 아닌(이사 41, 24) 다른 신들과 반대되는 분의 표현'이다.
- '나는 너희가 장차 보게 될 방식으로 너희와 함께 있다.' (여기서 사용한 동사는 미래와 현재를 동시에 표현).
- 결국 "있는 나"는 하느님의 실존적, 실천적 현존, 곧 사람들을 위해 계시는 그분의 존재를 드러낸다.(TOB)
"나는 있는 나다(EGO SUM EGO)."
이 신비로운 표현은 예수님에 의해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표현하기 위해 세상 안에서 다시 드러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높이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누구(EGO SUM)'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8, 28)
"만일 너희가 '내가 그이(EGO SUM)'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그와 같이 죄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죽고 말 것이다." (요한 8, 24)"
있는 나는, 네 곁에 있고, 너와 함께 있고, 네 어려움 가운데 있다.
네가 내 안에 머문다면, 너의 짐은 나의 짐이 되고 너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 된다"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이것이 예수님의 짐이 가볍고, 그 멍에가 편한 이유 아닐까?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기에 짐이 가벼워지지 않을까?
"나는 있는 나"이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오셨다.
우리가 되신 "있는 나" 하느님께서 이렇게 이르시는 듯하다.
"나는 너와 함께 있다.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도, 너의 하느님이다."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