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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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
전교 주일인 오늘, 우리는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한다. 전교와 복음화는 무엇이 다를까?. 교회의 사명인 선교를 강조하는 전교 주일은 1926년 제정되었다. 이후 전교는 신자 수의 증가가 아니라, 복음적 가치관의 증언임을 강조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에 따라 1960년대부터 "복음화"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1980년대부터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새로운 복음화”, 혹은 “새복음화”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즉 세례는 받았으나 복음적으로 내면화돼 있지 않은 교회와 신자들이 더 깊은 복음화, 즉 선교하는 교회는 먼저 교회 자신의 더 깊은 내면적인 복음화해야 함을 강조하게 되었다.
전교 혹은 선교란 단순히 천주교회에 입교하여 세례 받으라고 권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라고 하신 주님 말씀에 따르면 전교는 세상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는 것이다. 세례는 제자가 된 이후의 결과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 채 세례만 받을 수도 있다. 간디가 "그리스도는 좋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싫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답지 않음을 지적한 말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세례를 받았으나 예수님의 제자로 살지 않는다면 신앙의 기쁨을 모른 채 성당을 다니거나, 복음과는 거리가 먼 취미생활이나 동호회 모임처럼 신앙생활을 하게 되거나, 교회에 실망하고 냉담자가 되고 만다.
선교를 통해 타인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제자란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서 배우고 수련하는 사람이다. 예수님 시대도 그렇고 지금도 제자가 스승을 선택한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이와 반대로 주님께서 제자를 부르시고 가르치신다. 당시나 지금이나 통상적으로 제자들은 스승에게 학문이나 기술을 배웠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스승인 주님과 함께 살며 그 삶을 보고 배우며 따랐다. 즉 스승과 인격적 관계가 제자 됨의 바탕이었다. 인격적 관계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더 나아가 예수님을 인생의 기준으로 받아들여 그분의 삶의 방식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란 스승의 운명을 따르는 이들이다. 즉 스승처럼 십자가를 지고, 스승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마침내 스승과 하나가 되는 이들이 제자다(A. Feuillet). 그런 의미에서 제자가 됨은 단순히 세례 받음이 아니라 복음을 사는 것, 즉 복음화를 말한다.
사목신학자들은 현대의 신앙인을 "신자와 제자" 두 부류로 구분한다. "신자"란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교인이 되기는 하였지만, 신앙을 실천하지 않는 이들이다. 날씨가 너무 좋으면 놀기 위해, 너무 추우면 힘들다고 성당에 안 나온다. 피곤한 날이면 기도를 빼먹고, 조금 바쁘면 신앙 실천을 접어 둔다. 이렇게 이유가 닿기만 하면 신앙생활은 뒷전으로 밀어 놓는 이들은 명색이 신자라고는 하지만 살아가는 방식은 믿지 않는 이들과 다름이 없다. 입만 열면 남의 뒷담화를 일삼고 불평과 원망 속에서 허덕이며, 그런 자신에 대한 죄책감을 지니고 살아간다. 신자라는 이름을 지녔지만 이들에게 신앙은 기쁨이 아니라 무거운 짐이다.
신자와 달리 "제자"란 어떤 경우든 조건 없이 신앙을 실천한다. 날씨가 좋으면 좋아서, 나쁘면 나빠서, 바쁘면 바쁘더라도, 힘들면 더 열심히 신앙을 실천한다. 어떤 어려움도 이런 제자들의 신앙 실천을 가로막지 못한다. 이들은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였기에 그 사랑을 삶의 첫 번째 자리에 둔다. 제자들은 주님 안에서 회심의 삶, 변화된 삶, 거듭나는 삶을 살아간다. 늘 감사하고 기쁘게 봉사하며 인생의 짐을 평안히 받아들이며 지혜롭게 살아간다. 그러기에 이들 곁에는 머물기만 해도 위로와 격려를 느끼며, 새롭게 시작할 용기를 얻는다. 순교자들과 수많은 증거자들이 그러했듯 이들의 삶 자체가 이미 선교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선교교령 2항은 전교를 이렇게 정리하였다: "교회는 본성상 선교를 사명으로 하는 바, 이는 교회가 성부의 계획에 따라 성자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계획은 원천적 사랑에서, 즉 성부의 사랑에서 흘러나왔다." 즉 선교란 신앙에서 샘솟는 내면의 기쁨을 이웃과 나누는 행위다. 이 기쁨은 원천적 사랑에서 나온다. 원천적 사랑(Amor Fontalis)이란 사랑이 샘물처럼 흘러나온다는 뜻이다. 즉 선교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샘물처럼 흘러넘쳐 아들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셨듯, 사랑의 샘이 우리 가슴에서 흘러넘치는 사랑의 드러남이다. 선교는 재주도 아니고 기술도 아니다. 딱딱한 명령 수행의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넘쳐흐르는 사랑의 샘에서 나오는 자발적인 것, 샘솟는 활력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하느님 사랑의 드러남이다.
한국 교회를 두고 많은 전문가들은 70년대 이후 신자 숫자, 성당 건축 등은 늘었지만 신앙생활은 형식적이라고 분석한다. 회심 없이 마치 단체 가입하듯 늘어난 신앙인들은 복음의 핵심에 대한 이해도,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없는 편이다. 기본이 안 돼 있는데 어떻게 신앙의 참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겠나? 복음의 기쁨 없이는 그 복음의 선포도 공허하다. 예수님은 복음에서 사람들을 신자로 만들라고 명하지 않으시고 "제자로 삼으라"라고 이르신다. 예수님의 삶과는 동떨어진 채 예수를 믿으라고 강요하여 신자 숫자를 늘이는 행위가 선교는 아니다. 자신부터 기쁜 소식을 받아들여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감으로써, 그 기쁜 소식(복음)을 전하는 것이 선교다. 그러기에 '전교주일'인 오늘, 복음을 받아들여 살아간다는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한다.
제자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약속하신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가능한 선교는 다른 이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다. "생명은 내어 줌으로써 더 자라고, 고립되고 안주하면 약해집니다. ...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내어주는 그만큼 생명을 얻고 또 자랍니다. 선교도 분명 그러합니다." (복음의 기쁨, 10항)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전교 주일인 오늘, 내가 먼저 주님의 제자가 됨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주님을 보여주고, 주님께 인도하는 행복으로 주님은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리고 약속하신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