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0주일 나해 -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본문
연중 제30주일 나해 -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복음은 눈먼 거지가 눈을 뜨는 이야기를 전한다. 눈이 보이지 않기에 구걸하며 사는 인생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가 겪는 모든 괴로움은 눈만 뜨면 없어질 것 같았다. 눈이 먼 사람은 귀가 밝다. 눈먼 거지는 많은 병자를 고쳐 주셨던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문을 듣고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방해가 될까 염려하여 조용히 하라고 꾸짖자 오히려 더 크게 외쳤다. 인간답게 살고 싶은 마음에서 솟아 나오는 절규를 누가 막을 수 있을까?
눈먼 거지의 절규를 들으신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부르신다.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길을 가시던 하느님의 아들이 자비를 청하는 외침에 걸음을 멈추고 그를 만나신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지 드러나는 장면이다. 눈먼 거지처럼 내가 아무리 부족해도, 주변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더라도 간절히 자비를 청하면 주님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부르신다.
그리고 눈먼 거지에게 예수님이 물으신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눈먼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몰라서 물으신 것일까? 예수님은 눈먼 이가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닫도록 물음을 던지셨을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참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 그것이 치유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눈먼 이가 절박하게 예수님께 아뢴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은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이르신다. 자비를 필요로 하는 자신의 처지를 알고 간청하는 믿음에 창조주의 능력이 예수님을 통해 전해진다.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소통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때 맹인이 눈을 뜬다.
눈먼 거지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눈뜬 장님이라는 말이 있다. 삶에서 앞이 안 보이고 인생에 어둠이 가득하다면 우리도 장님이다. 이때 눈을 뜨려는 갈망은 맹인뿐 아니라 사람답게 살려는 모든 인간의 갈망이다. 사람다운 삶을 향한 이 갈망이 우리가 하느님께서 만드신 본래의 제 모습을 찾게 하는 원동력이다(성 아우구스티노).
이와 반대로, 빛이나 진리를 안다고 자부하거나, 먹고사는데 그런 영적 갈망 같은 것은 도움이 안 된다고 무시하는 이들도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 39)라고 이르신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상황을 뒤바꾸어 놓는다. 눈먼 이들은 예수님을 믿어 눈을 뜨고 하느님을 깨닫게 된다. 반대로, 잘 본다고 곧 현명하다고 자부하는 자들은 구원의 빛을 가져다주시는 분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앞 못 보는 소경보다도 더 심각한 소경은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다.
눈뜬 소경이 되지 않기 위해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시는 예수님의 질문을 매일 매 순간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 이 질문을 마주하여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고, 당신의 자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고백할 때 예수님은 우리 눈을 뜨게 하신다. 자신의 실제 모습을 직시하고, 자비를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는 "무엇을 바라느냐?(Id quod volo?)"라는 질문은, 무엇을 보려고 눈을 뜨려 할까? 눈을 뜨고 참으로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초세기 성경을 필사하던 이들은 이 장면을 필사하면서, 실수인지 의도적인지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는 맹인의 대답에 "당신을"이라는 단어를 추가해서 "제가 당신을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필사하였다. 여기서 쓰인 "본다"는 동사 anablepso는 "치켜보다, 위를 보다"라는 뜻이다. 즉, 단순히 세상을 보는 것만 아니라 위를, 위에 계신 하느님을 바라본다는 원의가 담긴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눈을 떠야 할 이유는 주님을 보기 위해서이다. 눈 뜨고 예수님을 보게 해 달라는 신앙 고백이 "제가 당신을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는 필사에 담겨있다(A. 그륀).
예수님은 맹인에게 "가거라" 하고 말씀하시지만, 눈을 뜨게 된 맹인은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라고 복음은 마무리된다. 예수님의 얼굴을 본 이들, 빛을 본 사람은 다른 길을 가지 않고 예수님을 따른다. 단순하지만 감동적인 장면이다. 우리의 갈망이 어떻게 채워지고, 참으로 그 갈망이 누구에게서 완성될 것인지 전해준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육신의 눈을 떠서 세상을 보게 하시고, 나아가 믿음의 눈을 뜸으로써 참 빛이신 당신의 현존을 보게 하신다. 우리가 빛을 본다면 이 빛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빛이신 예수님을 따라나선다. 그분 안에서 우리 갈망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사건이 신비롭게도 지금 봉헌하는 미사 성제에 담겨있다: 자비를 구하는 간절한 소망(kyrie eleison)에, 주님은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우리에게 시선을 돌려 말씀하신다(말씀의 전례).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갈망을 모아 온 존재를 봉헌하시고(예물 봉헌),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중재자로서 소통을 이루시며(성변화), 눈을 뜨고 당신을 보도록 우리에게 현존의 살과 피를 주시어 우리와 하나가 되신다(communion 영성체). 그리고 떠나라고 파견하신다(ite missa est 파견).
어두운 세상이다. 빛을 찾으려 하는가? 그렇다면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주님께 외치자. 그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던지시는 질문,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마주하자. 이 질문 앞에 무엇 때문에 내 눈이 멀었는지, 빛을 보지 못하는 나는 누구인지 드러난다. 그리고 내 어둠과 아픔과 한계를 그대로 말씀드리자. 그 끝에 내가 인생의 주인이 아니고, 빛이신 당신이 주님이라는 믿음으로 "제가 당신을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씀드리자. 그때 주님께서 빛을 주신다. 빛이신 당신 자신을 건네주신다. 그 빛과 하나가 되어 새롭게 길을 떠나자.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