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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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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3주일 나해 -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4-11-17 08:44   조회: 1,070회

본문

연중 제33주일 나해 -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전례력으로 한 해가 끝나가는 연중 제33주일 성경 말씀은 세상의 종말에 관한 이야기다. 성경에서 종말의 모습은 우리에게 생소한 묵시문학이라는 양식으로 기록되었다. 묵시문학은 현세의 재앙과 파멸을 묘사하며 그 뒤에 올 새로운 세상에 대한 절박한 기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그러기에 이해하기 어렵고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종말을 다룬 묵시문학은 본질적 메시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 메시지는 한마디로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선언이다. 우주와 역사, 사회와 개인의 삶에는 끝이 있다는 선언이 묵시문학 양식으로 표현된 종말에 관한 모든 말씀의 핵심이다.

 

복음은 종말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 무렵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해와 달과 별로 표현한 빛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첫 작품이다(창세기 1, 3). 해와 달과 별에서 빛이 사라지는 상황은, 빛을 창조하신 하느님이 그 빛을 거두신다는 것을 상징한다. , "시작이며 마침"(묵시 21,6)이신 하느님이, 태초에 시작하신 일을 끝내신다는 의미다.

 

이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활엽수인 무화과나무의 순이 돋을 때는 여름이 시작될 때다. 히브리 말로 "여름(카이츠)"'(케츠)"을 의미하기도 한다. 무화과나무 잎을 보고 "여름이 온 것을 안다"는 말씀은 "끝이 온 것을 안다"는 의미다. 그렇듯 계절이 끝나듯 삶에도 끝이 있음을 깨닫고 준비하라는 말씀이다.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재앙의 때가 오리라. 그때에 ...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라는 첫 독서의 종말 예언 역시 세상에 끝이 있음을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끝의 시간은 언제일까? 예수님은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라고 분명히 이르신다. 종말의 시간은 하느님의 시간으로 하느님 외에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예수님도 모르는 불확실한 시간이다. 그러기에 종말에 관한 말씀은 늘 "깨어 있어라"라는 당부로 이어진다. 종말의 시간을 알 수 없기에 항상 깨어있어야 하고, 그 깨어있음이 우리를 사람답게, 신앙인답게 살게 이끈다.

 

깨어 있는 것은 오늘을 종말로 여기는 것이다. 종말은 지금의 세계와 무관한 미래의 사건이 아니다. 종말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태도에 따라 달라지는 미래다. 하루를 시작하며 끝이 있음을 알고 깨어있는 마음으로 '오늘이 그날'이라 여긴다면, 지금 여기서 감사하고 용서하며 사랑으로 충만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반대로, 삶의 끝을 잊고 사랑과 용서와 나눔의 기쁨을 미뤄둔 채, 눈앞의 이익에 집착하며 하루를 보내면 결국 후회하게 된다. 그런 사람에게 종말은 분노와 자책의 시간이 된다. 마지막 날에 할 일을 지금 여기서 실행하는 것이 깨어 있는 삶이다.

 

한 남자가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어서 저승으로 갔다. 염라대왕이 물었다. "너는 살아 있는 동안 무엇을 했느냐?" 남자는 대답했다. "저는 남들처럼 살아왔습니다. 어린 시절엔 남들처럼 뛰어놀았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남들처럼 공부했고, 청년이 되어서는 방황도 했고, 결혼해서는 가족들을 위해 남들처럼 쉬지 않고 일했고,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저 남들처럼 살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말을 듣고 염라대왕은 이렇게 말했다. "그럼 너는 이제부터 남들처럼 여기에서 살 거라."

 

그 남자는 남들처럼 살다가 갑자기 끝난 인생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 번도 제대로 자기답게 살아보지 못했다는 생각, 좀 더 자기만의 의미 있는 있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그래서 염라대왕에게 간청했다. "저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그러면 진짜 저 다운 삶을 살아보겠습니다. " 염라대왕은 "그건 안 된다." 남자는 다시 이렇게 애걸복걸하였다. "염라대왕님, 저는 제가 이렇게 빨리, 이렇게 갑자기 죽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왜 저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으셨습니까?"

 

염라대왕은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늘 너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하루가 저무는 것도 나의 메시지였고, 너의 이마에 주름살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도 나의 메시지였다. 머리에 흰머리가 하나씩 늘고, 조금만 뛰어도 숨이 가빠지는 것 역시 나의 메시지였다. 하지만 너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인간들은 왜 그런지 모르겠구나. 평소에는 대충 살다가 끝이 되면 되면 땅을 치며 후회하는지 ..."

 

매일 매 순간을 인생의 마지막처럼 충실히 살아가는 신앙인에게 종말은 파멸이 아니라 구원의 시간이다. 그리스도께서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셨기"(2독서)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드리신 예물, 그리스도 자신은 우리와 하느님을 이어주는 끈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는 이들에게 종말은 우리를 위해 희생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연결되어 하느님을 뵙게 되는 순간이다. 종말을 알 수 없기에 그 날과 그 시간이 두려운가? 우리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마주 보라. 목숨을 내어주신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다. 그 사랑이 아무런 확실성 없는 세상을 순례하는 우리의 희망이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이들의 끝은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다.

 

세상에는 종말이 있고 우리 삶도 끝이 있다. 무화과나무 잎을 보며 봄의 끝을 알듯, 삶의 끝을 생각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끝을 망각하고 시간을 흘려보낸다면 염라대왕 앞에서 인생을 후회하는 사람처럼 될지 모른다. 끝을 염두에 둔다면 아무도 모르는 "그 날과 그 시간"을 바로 오늘 여기로 받아들인다. 끝을 기억하며 오늘을 마지막 날처럼 여기고 산다면, 미워할 이유도, 집착할 필요도 사라질 것이다. 더욱이 나를 위해 자신을 예물로 봉헌하시는 그리스도를 마주한다면, 지금 여기서도, 삶의 끝 순간에도 감사와 찬미로 충만한 평화를 누릴 것이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 36: 화답송)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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