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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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지난밤, 인간적인 것이 거룩해지는 길을 열어주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경축하였다. 오늘 낮 미사에서 듣는 요한복음의 로고스 찬가는 강생의 의미를 신비적으로 일러주며 그 신비에 참여하라고 우리를 초대한다. 찬가는 이렇게 시작한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세상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기에 창조된 만물은 말씀과 관련이 있다. 산, 바다, 동물, 식물, 바람, 햇빛 등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 말씀이 담겨있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나 자신과 내가 만나는 사람들, 살면서 겪는 희로애락, 생로병사의 모든 과정에 하느님의 말씀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말씀이 피조물 안에 그저 흔적처럼 머무르지 않고, 오늘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셨다는 선언이다.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이시다. 세상을 창조하시던 그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 그리하여 인간이 하느님처럼 거룩해지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여기서 "생명"은 단순히 숨이 붙어 있는 생물학적 상태(vio)나, 기쁨 없이 피상적으로 사는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명"(zoe)은 하느님 안에서 살아있고 생기 넘치는 상태, 영원한 하느님을 모신 상태를 말한다. 이 생명이 세상을 밝히고 사람의 갈 길을 일러주는 빛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어둠, 극복할 길 없는 절망이 참된 말씀인 예수님을 통해 빛을 받게 되었다는 선언이다. 그러나 모든 이가 이 빛을 받아들이고 생명을 누리지는 못한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왜 세상은 영원한 생명과 어둠을 비추는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맞아들이지 않았을까? 그분의 모습이 사람들의 기대와 달랐기 때문이었다. 하느님께서는 강력하고 화려하고 풍요롭게 오시길 기대했는데, 노동자를 부모로 해서 초라한 말구유에 힘없는 핏덩이 아기로 태어나셨으니 알아보지 못했다. 여기서 그분을 알아보고 맞아들일 길이 보인다. 자신의 기대를 내려놓고 가난한 마음으로 겸손하고 단순하게 말씀을 받아들여야 예수님을 알아보고 맞아들인다.
성탄을 맞이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은 우리가 받은 소명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신비가 탄생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말한다. “영원이 바로 당신 안에서 탄생해야 한다."
신비주의자들은 인간의 본성이 마치 성난 황소와 고집불통인 당나귀가 사는 외양간과 같다고 풀이한다. 우리가 내면의 많은 공간을 저 황소와 당나귀에게 내어주고 있고 심지어 자신도 모르게 먹이를 주며 기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자. 분노와 고집불통의 틈바구니에서, 그것들을 밀어내고 영원하신 분이 탄생하신다. 그리스도는 고집불통 당나귀와 성난 황소의 여물통에 나셔야 한다. 그리스도가 탄생하실 때 가장 먼저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분노와 고집이다." (이블린 언더힐)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고집을 꺾고 겸손한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하느님에게서 태어나게 된다. 오늘 아기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 우리 가정에, 우리 공동체에 다시 태어나시려고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성난 황소와 고집불통인 당나귀처럼 주님의 초대를 외면하면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 밖에 계시겠지만, 분노와 고집을 내려놓고 아기 예수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주님께서 우리 안에 태어나시고 우리도 하느님에게서 새로 태어나 새사람이 된다.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떻게 아기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할까? 서로가 서로를 예수님 대하듯 받아들이면 된다. 갑갑한 남편을, 한심해 보이는 아내를, 못마땅한 자식을, 늙어가며 잔소리만 하는 부모를,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못났다고 감추고 외면하면, 성난 황소와 고집불통인 당나귀처럼 주님을 외면하게 된다. 자신이든 남이든 마음에 들지 않고 부족하더라도 무릎을 꿇은 황소와 당나귀처럼 상대방의 입장에서 받아들일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다시 태어나시고, 우리는 하느님 안에 다시 태어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찬미가의 핵심이고 절정인 이 말씀으로 로고스 찬가는 마무리된다. 이 구절에서 “우리 가운데 사셨다.”를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셨다.”이다. '천막'은 성경에서 심오한 주제를 담고 있는 개념이다.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고 그 증표인 십계명을 계약의 궤에 담아 천막에 안치했다. 모세는 여기서 하느님을 만났다. 즉 천막은 하느님 현존의 장소이자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었다. 후일 천막은 솔로몬에 의해 성전이 되었지만 나라가 망하며 파괴되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셨다"라는 말은 이전에 하느님이 모세와 만난 천막은 없어졌지만, 이제 우리 가운데 하느님이 새로운 천막을 치심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모시게 되었다는 의미다.
영원한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덧없는 세상에 오시어 나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시고, 육신을 취하심으로써 부족하고 한계 많은 인간 실존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 된다. 사람이 되신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어 세상 피조물과 모든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뵙게 하신다.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영원한 사랑이신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 다시 태어나게 되었고, 하느님의 영광 속에 우리의 생명이 빛나게 되었다. 그렇듯 성탄은 나를 위해 태어나신 하느님의 사랑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