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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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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세례 축일 -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5-01-11 13:26   조회: 856회

본문

주님 세례 축일 -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오늘은 성탄 시기가 끝나는 주님 세례 축일이다. 성탄 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이 세상에 드러나는 신비를 묵상하였다. 마리아와 요셉과 목동들에게 예수님이 드러나신 성탄에 이어, 공현에는 동방박사들을 통해 온 세상에 공적으로 드러나셨고, 주님의 세례 축일인 오늘은 하느님이 직접 예수님이 누구인지 일러주신다. 예수님은 하느님에게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셨다.

 

이는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들려온 말씀이다. 요한의 세례는 죄인이 받는 예식이었다. 죄를 씻고자 하는 사람이 죽음을 상징하는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옴으로써, 죄에서 죽고 새로운 삶을 결심하는 예식이었다. 그런데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 왜 죄인들 틈에서 세례를 받으셨을까? 이 사건은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물에 잠겨 죽으심으로 죄를 없애시고, 물에서 나오듯 부활하심으로 인류를 거듭나게 하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예표로 볼 수 있다.

 

창세기에서 물은 혼돈을 상징했다. 그 위에 하느님의 숨()이 바람처럼 내려 세상이 창조되었다. 하느님은 이를 보시고 "좋다"고 말씀하셨다. 세상 창조 때 등장한 물과 성령과 하느님의 말씀, 이 세 요소가 예수님의 세례에서 동일하게 등장한다. 예수님이 요르단 강물에 들어가시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리시고, 하늘에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씀이 들려왔다. 이처럼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며, 죽으심과 부활로 열리는 새 세상의 예표로 볼 수 있다.

 

이 세례는 우리가 받은 세례에서 재현된다. 예수님이 요르단 강물에 들어가셨듯 우리도 이마를 세례수로 씻었고, 하느님 친히 예수님을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언하셨듯,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고, 예수님의 세례 때 내렸던 성령이 우리에게도 내려오시는 신비가 우리가 받은 세례성사였다. 이 세례로 신앙인은 "그리스도와 합체된다."(교회헌장 11, 3) 그리스도와 합체, , 한 몸이 되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존재로 변화된 증표로 새로운 이름(세례명)을 받고, 그리스도의 삶을 살게 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이 창조된 사람들이다.

 

이 신비의 핵심은 받아들여짐에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자각"이라고 H. 나웬은 일러준다. 세상의 단체는 대부분 특정한 조건을 채워야 사람들을 받아들인다. 취업을 하려면 능력을 인정받아야 하고, 동창회에 가입하려면 같은 학교를 나와야 한다. 적금을 타려면 불입금을 납입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세례 때 들려온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선언은 자격을 갖춘 이에게 주는 합격증이 아니다. "난 네가 무슨 공을 쌓았기에, 말을 잘 들어서, 공부를 잘해서, 착한 일을 해서 널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내 자식이기에 있는 그대로 너를 사랑한다. 네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든 그저 사랑스럽기만 하다"라는 뜻이다(A. 그륀). 이렇게 조건 없이 받아들여지는 체험이 내가 사랑받는 존재임을 자각시키고, 하느님 자녀로 세상을 살아갈 의미를 준다.

 

하느님은 우리를 받아 주셨다. 그것이 우리의 세례였다. 이제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인정받기 위해서 허덕이며 무슨 조건을 채워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이 나를 받아주신 아버지이심을 믿음으로 넉넉하다. 하느님의 아들, 딸로 받아들여진 이 세례에서, 사람이 하느님처럼 되는 길이 열린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은 우리가 생로병사를 겪으며 몰락하는 육신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하느님의 영원성에 참여하는 길이 열렸다는 뜻이다. 이 사실을 망각하고, 우리에게 주신 은총을 망각할 때 하늘은 다시 닫힌다.

 

한 인디언이 독수리의 알을 닭의 우리에 넣은 전설이 있다. 병아리들과 함께 부화된 새끼 독수리는 자기를 항상 닭이라고 생각하며 닭들이 하는 짓을 했다. 씨앗과 벌레를 찾으려고 진흙을 파헤치고 꼬꼬댁 거렸다. 날아도 닭들처럼 푸드득거리기만 했다. 몇 년이 지났다. 하루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높이 날고 있는 멋진 새를 보았다. 날개를 푸드덕거리지도 않으며 힘찬 바람을 타고 우아하게 높이 솟아오르는 모습을 보고, "정말 멋진 새구나!" 닭이 된 독수리가 감탄하며 옆에 있는 진짜 닭에게 물었다 "제게 무슨 새지?" "독수리야. 새의 왕이지." 닭이 대답했다. 그리고 독수리에게 충고하였다. "꿈도 꾸지 마. 넌 절대로 저렇게 될 수 없다고." 그 독수리는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고, 닭장의 닭으로 살았다고 한다.

 

독수리가 닭장 속의 닭으로 전락했듯, 우리는 본래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들이었지만 무지와 탐욕으로 이기심과 죄의 감옥에 갇혀 살았었다. 하지만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어 죽으심과 부활로 세상의 죄를 없애셨다. 더욱이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는 죄에 죽고 은총으로 새로 나는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하는 은총을 주셨다. 그런데 아직도 닭장 속의 닭처럼 무지와 탐욕의 틀에 갇혀서, 열등감과 뒷담화 속에 허우적대면서, 자신의 존엄성을 잊어버린 채, 닭짓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게 계속 닭으로 살 것인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해방된 삶을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우리가 닭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우칠 수 있을까? 무의미나 공허로 가득 찬 어두운 골짜기에서, 삶의 무게에 짓눌려, 사랑과 희망도 없이, 한없이 두렵고 자신으로부터 멀어질 때, 폴 틸리히는 이렇게 고백하라고 가르친다: "그대는 받아들여졌다. 그대보다 더욱 위대하고 그대가 알지 못하는 이름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지금 그 이름을 묻지 말라. 아마도 이후에 그것을 알게 되니라. 미래에 대해 아무 근심도 하지 마라. 그저 단순히 그대가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받아들여라."

 

오늘 예수님의 세례 때 하늘이 열렸듯, 하느님의 사랑 안에 인간이 조건 없이 받아들여지는 신비, 내 모습의 밝음과 어두움이 무조건 다 받아들여진 세례가 우리가 받은 세례였음을 기억하자. 예수님께 이르셨듯, 하느님께서 세례 받은 우리 한 명 한 명에게 이르신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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