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일 다해 - 포도주가 떨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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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주일 다해 -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공생활을 묵상하는 연중시기가 시작되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 사건을 전한다. 사건은 혼인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벌어졌다. 혼인 잔치는 남녀의 합일을 축하하는 자리로, 성경에서는 하느님께서 인간과 하나가 되는 기쁨을 상징한다. 첫 독서 이사야서는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라고 예언한다. 기쁨 가득한 이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잔칫집에서 포도주란 무엇일까? "술은 마음의 즐거움이요 영혼의 기쁨이다."(집회 31, 28)라고 성경은 말한다. "포도주 안에 진실이 있다.(in vino veritas)"는 격언도 있다. 잔치를 잔치답게 만드는 포도주는 '어떤 상황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를 상징한다. 비유적으로 포도주는 인간관계에서의 사랑과 신뢰, 이해와 격려, 곤궁할 때의 도움 등 삶에 기쁨과 활력을 주는 것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은, 삶에 생기와 기쁨을 주는 요소,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가 떨어진 상황을 의미한다.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마리아는 예수님께 다가가 "포도주가 떨어졌다."라고 알린다. 현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이 태도는 중재 기도의 전형이다.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볼 때는 뒤에서 수군거리며 험담하지 말고 마리아의 모범대로 주님께 나아가 알려야 한다. 남의 어려움을 내 일처럼 여기고 남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라는 답변을 하신다. 냉정하게 들리는 아들의 대답에 성모님은 무안하지 않으셨을까? 서운해서 눈물이 나거나 화가 나서 잔칫집을 떠날 수 있는 상황이다. 마리아는 아들의 거절에 아랑곳없이 일꾼들에게 이르신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듯 느껴지는 하느님의 침묵에도 변함없이 믿는 모습이다. 어떤 상황에도 한결같은 신뢰, 온전한 믿음의 모범이 마리아의 이 말씀에 담겨있다.
마리아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일꾼들에게 물독에다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신다. 하늘에서 포도주를 직접 내려 주지 않고 이름 없는 일꾼의 봉사를 요구하시는 모습이다. 꼭 있어야 할 술을 마련하여 기쁨을 회복하기 위해 누군가의 봉사가 필요하다. 가정이든 공동체든 사회든 묵묵히 봉사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작은 봉사가 사실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주님의 일에 협력하는 일이다. 이를 두고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라고 사도 바오로가 둘째 독서에서 강조한다.
복음은 이 사건을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라고 정리한다.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이 사건을 "기적 dynameis"이라고 하지 않고, "표징 semeia"이라고 부르는 점이 특이하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사건은 기적, 즉 자연 과학 법칙에 의해 설명될 수 없는 놀라운 사건이 아니라, 표징(sign), 즉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표징이라는 말씀이다. 그 표징이 지시하는 실체는 무엇일까?
이 사건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는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하신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씀이다(베네딕토 16세). 아직 오지 않은 "당신의 때"는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실 시간, 즉 십자가와 부활로 하느님 아들의 영광이 드러나는 때다. 이 십자가상 죽으심과 부활은 카나의 혼인 잔치 한참 후에 벌어질 사건이기에 예수님은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고 어머니께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의 요청에 이 "때"를 앞당기신다. 즉 앞으로 벌어질 영광인 죽으심과 부활 사건을 미리 드러내신다. 그러기에 이 사건을 두고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라고 규정한다. 이렇듯 카나 혼인잔치는 단순히 포도주를 많게 하신 기적을 넘어서서 죽으심과 부활로 드러날 구원이 지금 여기서 앞당겨진 표징이다.
이 사건에 등장하는 물동이와 물은 본래 구약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에 사용되었다. 그 물동이의 물이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로 변해 기쁨의 표징이 되었다. 구약의 율법이 예수님에 의해 완성됨을 암시한다. 물이 상징하는 정화를 위한 인간의 노력, 즉 율법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포도주가 상징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기쁨의 잔치가 시작되었다. 이 물동이는 완전수 일곱에서 하나가 모자란 여섯이었다. 교부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일곱 번째 포도주 동이가 되신다고 해석했다.
혼인잔치의 신비는 오늘도 성체성사에서 계속된다. 성찬례에서 마리아의 간청을 받아들이셨듯 예수님은 교회의 기도를 받아들여,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듯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살과 피로 바꾸시고, 영성체를 통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하나가 되신다. 그렇게 주님은 성체성사로 종말의 하느님 나라 잔치를 앞당기시어,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 되는 혼인 잔치를 벌이신다.
우리 삶을 돌아보자. 혼인 잔치에 참여하듯 기쁘게 살고 싶지만 쉽지 않다. 좌절하고 실망하는 자신이나 이웃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혼인 잔칫집의 포도주처럼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는 어디 있을까? 진정한 기쁨은 무엇이고 어디서 올까? 전염병(흑사병)이 창궐하던 중세에 죽음의 문턱에서 하느님을 체험했던 노르치의 줄리안은 "기쁨이란 세상 일을 통해 하느님을 목격하는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지금 여기의 삶에서 하느님을 목격하기 위해 복음의 표징을 다시 보자.
예수님은 성모님의 중재와 우리의 숨은 봉사를 통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고, 궁극적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험한 때일수록 성모님의 중재를 청하며 간절히 기도하라는 초대를 복음은 전한다. 물동이에 물 붓듯 보잘것없는 작은 일이라도 주님의 말씀에 따라 묵묵히 봉사하자. 물이 포도주로 바뀌듯,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 삶을 기쁨으로 채울 것이다. 복음에서 나중의 포도주 맛이 처음보다 더 좋았다고 한다. 하느님과의 합일을 이루는 혼인 잔치인 성체성사에서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실 때, 우리 삶은 이전의 삶에 비교할 수없이 새로운 맛과 활력을 되찾을 것이다.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