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 -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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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 -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복음)
공현 시기 말씀은 강생의 인간적 차원과 신적 차원의 양면성을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빵의 기적(어제 복음)에서 제자들은 먹는 문제를 해결하시는 구세주 예수님을 보았다.
제자들에게 이 사건은 인간적 차원에서 강생의 의미 체험이었으리라.
빵의 기적 직후, 물 위를 걸으시는 장면은 인간적 차원에서 이해하기 힘든 신적 차원의 모습이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신적 차원의 주님을 보고 놀라는 이유는 인간적 사고의 틀을 깨지 못했기 때문 아닐까?
예수님의 인간성뿐 아니라 신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적 사고의 틀을 깨야 했다.
주님은 빵 문제 해결사로 강생하지 않으셨다.
단순히 인간적 차원에서만 삶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시지 않았다.
세상의 구원자로서, 세상이 아닌 하느님께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시다.
이를 깨닫지 못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자주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신다.
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 즉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아버지께 대한 신뢰였다.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독서)
같은 맥락에서 요한의 첫째 편지도 인성과 신성의 결합으로서의 강생을 묵상하도록 초대한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참으로 인간적이기에 신앙을 갖지 않은 이들도 좋아한다.
사람 사이의 조화와 위로와 평화를 가져오는 사랑, 가난과 전쟁을 몰아내는 사랑 등등,
인간적 차원에서 이해한 이러한 사랑을 넘어서서 요한은 신적 차원의 사랑을 선포한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길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이지만,
그를 위해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믿음은,
사람의 능력 만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적 사랑을 넘어서서 하느님과 우리를 결합시킨다.
사람이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 사람 안에 머무르시는 참 사랑이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으로 들린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도록 우리가 하느님을 변화시키시지 않고,
당신 안에 우리가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성 아우구스티노)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