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5주일 다해 -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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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5주일 다해 -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믿고 그 말씀을 따름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간절히 하느님을 만나려고 한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인간이 하느님을 만난 이야기다. 첫째 독서는 이사야에게 거룩하고 엄위롭게 나타나신 하느님 이야기, 둘째 독서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바오로에게 나타나신 주님 이야기, 복음에서는 기적적인 고기 잡이를 통해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이야기를 전한다.
만남에 관한 세 이야기는 공통적으로, 사람이 하느님께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을 찾아오셨음을 전한다. 인간은 하느님을 뵙자 공통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놀라움과 자신의 비천함을 절감한다. 이사야는 주님을 뵙고는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라고 두려워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바오로는 자신을 부족하기 그지없는 칠삭둥이라고 하며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이라고 고백한다. 어부인 베드로는 목수인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 결과, 그물이 찢어지게 많이 잡힌 고기를 보고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한다. 이렇듯 하느님을 만나면 한편으로는 인간과는 전혀 다르신 하느님의 거룩함과 엄위에 놀라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부당한 죄인인가를 절감하는 것이 공통된 반응이었다.
왜 하느님은 인간을 부르실까? 하느님은 무엇이 부족한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은 무엇이 필요하여 기술이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기 위해 부르신다. 참 사랑은 능력과 자격요건을 갖춘 이를 고용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를 믿고 존중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사랑이다. 이 사랑의 부르심을 듣는 사람, 자신의 본래 모습을 인정하는 순수하고 겸손한 이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부당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은 이렇게 순수하고 겸손하게 자신을 인정하는 인간을 새로 나게 하신다. 첫째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천사들 틈에서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하자 천사가 타는 숯을 입에 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하며 죄를 씻어 준다. 복음에서 베드로는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낚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그물이 찢어지게 고기가 많이 잡히는 체험을 한다. 자신과 예수님이 이토록 다르다는 놀라움에 베드로는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하고 고백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베드로를 새로 나게 하시고 새 삶을 살아갈 사명을 주신다.
인간을 부르시는 하느님은 부르신 사람에게 사명을 주신다. 이사야에게는 당신을 대신하여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주시고, 베드로에게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사명을 주시며, 바오로에게는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주신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오늘도 계속된다. 인간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깨달아서, 지신과 타인과 세상을 위하여 살아가는 의미와 보람을 체험하며, 당신의 생명을 누리라고 하느님은 인간을 부르신다.
하느님이 인간을 부르시고 사명을 주시는 곳은 어딜까? 이사야는 성전에서, 바오로는 다마스커스로 가던 길에서, 베드로는 생업의 현장에서 부르셨다. 한마디로 하느님이 보시기에 적합한 곳은 가정이나 사회나 교회 등 어디에서나 부르신다. 집안의 가장으로서의 역할이나 어머니로서의 역할, 공동체에서의 기도와 봉사 등은 단순한 의무나 취미 활동이 아니라 하느님이 부르셔서 맡기신 사명이다. 가정이나 교회 공동체에서 더 나아가 사회도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곳이다.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한 이들은 어디든 빛과 소금처럼 그 은총을 증거할 사명을 지닌다. 사명을 받은 이들은 가정이든 사회든 경제적 이익만을 남기기 위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활동을 통해서, 그 활동 중 만나는 이들에게 삶의 소중함, 인간의 존엄성을 일깨워 주는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활동하게 된다.
이전에 이사야에게, 바오로 사도에게,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듯, 오늘도 하느님은 우리 앞에 나타나신다. 말씀과 성찬 중에 오시고, 기도 중에 나타나시고, 고통받는 이웃의 한숨 속에 우리에게 오신다.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 앞에 이사야나 바오로, 베드로가 고백하였듯 먼저 자신의 부당함을 고백하자. "내 탓이요"로 미사를 시작하듯,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참된 만남이 이뤄진다. 주님은 우리에게 책임을 묻고 책망하려고 부르시지 않고, 부당한 우리를 정화하시고 당신의 소중한 자녀로서 세상을 의미 있게 살아갈 사명을 주시기 위해 부르신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부르신다. 오늘 주님의 목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시 95, 8)는 말씀대로, 우리를 부르신 그분 앞에 엎드리자. 이제까지의 인간적 능력이나 경험을 훨씬 벗어나는 하느님의 위대하심 앞에 겸허히 엎드려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내려놓자. 그때 하느님의 역사가 시작된다. 어부 베드로가 고기 잡는 기술과 그물을 버릴 때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듯, 우리가 우리 판단이나 재주를 버리고 주님 앞에 엎드릴 때, 하느님이 사명을 주실 것이다. 복음은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전한다. "제자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