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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6주일(다해) 부자와 라자로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5-09-29 09:34   조회: 9회

본문

연중 제26주일(다해) 부자와 라자로


독서와 복음은 부자들에 대한 경고를 전한다. 첫째 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죽어가던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재산에 기대어 향락에 빠진 이들에게 엄중히 경고한다. “이제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니 비스듬히 누운 자들의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려운 시절에는 하느님께 매달리던 사람들이, 걱정이 사라지면 더 편한 것, 더 재미있는 것만을 찾다가 하느님을 잊고, 가난한 이웃을 외면한 채 재산만을 의지하는 경우가 있다. 복음은 그런 삶이 결국 파멸로 이어진다고 알려준다. 


​복음에는 이름 없는 한 부자와, 이름이 불린 가난한 사람 라자로가 등장한다. 라자로는 종기투성이 몸으로 부잣집 대문 앞에 앉아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연명하지만, 결국 대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죽은 뒤에 부자는 고통의 장소에서, 라자로는 아브라함 품에서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서로 왕래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자는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재산이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으며 거기에 매달리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 ‘부자’다. 그는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모르고, 이웃의 고통에도 무감각하며, 하느님께 대한 신뢰도 잃어버린 사람이다. 반대로 성경이 말하는 ‘가난한 이’란 단순히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세상의 주인이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알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며 하느님의 자비에 의지하는 사람이 가난한 이다. 예수님이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기에 부자에서 가난한 이로 회심하는 것이 행복의 길이다. 즉 자기 힘으로 세상의 재물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태도에서, 은총의 힘으로 하느님의 손길에 의지하는 삶으로의 전환이 예수께서 세상에서 선포하신 회개였다. 회개의 삶을 살기 위해, 부자가 라자로처럼 변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이 그 출발점이다. 


​복음에 따르면 죽은 후에 부자는 아직 살아있는 형제들이라도 회개할 것을 경고해달라고 하자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말씀을 듣는다. 부자가 그것으로는 안 된다고 하자 그들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이어진다. 여기서 회개의 핵심이 제시된다. 모세와 예언자들이 전한 말씀,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의 말씀,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부자가 라자로가 되는 회개의 길, 재산이 아닌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하는 삶으로의 변화는 말씀을 들음에 있다.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따름이 회개다. 말씀을 듣지 않고는 회개할 수 없고, 회개 없이는 구렁텅이에 빠진 부자의 운명을 면할 길이 없다. 


​복음에서 부자가 죽은 다음 고통받는 이유는 생전에 사기를 쳤거나 도둑질을 해서가 아니다. 단순히 많은 재산을 가졌기 때문도 아니다. 라자로의 고통을 외면하였기 때문이다. 진정한 비극은 부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아픔에 눈 감고, 함께 아파하지 못하며, 소통할 수 없을 때 생겨난다. 건강한 몸은 아픔을 느낄 줄 아는 몸이다. 그러나 라자로의 배고픔과 고통을 느끼지 못한 부자의 무감각은, 암이나 나병보다 더 깊은 병이 되어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1코린 12, 12-27).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순간, 몸 전체가 병드는 것이다.


​이 비유 속 "죽었다가 살아난 분"이란 바로 예수님이다. 남의 아픔에 눈멀고 남의 고통에 귀먹어 소통이 불가능한 사람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볼 수 없다. 재물과 재능을 자기만을 위해 쓰는 태도는 스스로 구렁을 파는 것이며, 결국 자신이 판 구렁에 갇혀 모든 관계가 끊어지게 된다. 살아서 하지 못한 나눔과 소통은 죽어서도 할 수 없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웃과 나누는 일은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이다. 주님의 경고는 단지 물질적 부자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나다. 자신만을 위해 살면서 남과 소통하지 못하고, 마음의 구렁을 파고 그 안에 숨어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


​이제 라자로에게로 눈길을 돌려보자. 복음에서 부자는 그 이름이 나오질 않는다. 가난한 사람에게만 "라자로"란 이름을 주신다. 흔히 세상에서는 부자나 유명한 사람 이름이 자주 들먹여지는 것과는 반대다. "라자로"란 단어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뜻이다. 부자는 이름 없는 채로 두시고, 남의 집 대문 밖에서 웅크리고 사는 사람, 남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는 사람, 알아주는 이 없이 동네 개들만 모여오는 종기투성이의 존재, 한마디로 사람 취급 못 받는 이 사람에게"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는 이름을 주신다. 하느님께서 어떤 이에게 눈길을 두시는지 잘 보여주는 역설이다.


​우리는 누구일까? 부자나 라자로 둘 다 우리 모습이다. 사실 우리는 때때로 어떤 부자도 되고, 때때로 라자로이기도 하다. 어떤 때는 혼자만을 위해 구렁을 파고 숨으려는 부자가 되고, 어떤 때는 힘들어 오갈 데 없고, 갑갑하여 하소연할 곳 없는 라자로가 된다. 여유가 있을 때는 자신을 감추려는 큰 구렁을 파기보다 나눔과 소통으로 구렁을 메울 때다. 가난과 고통으로 삶이 너무도 힘들다면 그것은 절망의 이유가 아니라 "라자로", 곧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믿음을 굳게 할 순간이다. 말씀을 듣고 회심하여 우리 눈길을 하느님께 돌릴 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라자로로 받아주신다.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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