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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한다.
(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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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8주일 다해 -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5-03-03 13:23   조회: 701회

본문

연중 제8주일 다해 -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

 

"말이 곧 그 사람이다"라는 격언이 있다. 사람의 말은 그의 인격을 보여준다. 사람이 과거를 돌아보며 참으로 후회하는 일 중에 하나가 말을 잘못해서 겪은 불화나 아픔이다. 이와 달리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듯이 위로와 용기를 주어서 삶을 새로 시작할 힘을 전해주기도 한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신앙인의 삶에서 말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돌아보도록 초대한다.

 

"사람의 허물은 그의 말에서 드러난다 사람은 말로 평가되기 때문이다"라는 지혜를 첫 독서는 전한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라고 일러주신다. 삶을 돌아보면 누구나 공감하는 말씀이다. 말 때문에 생긴 허물로 어려움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다.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쁨을 가져다준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곰곰이 살펴볼 때, 마음에서 넘치는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떻게 불화가 아닌 평화를, 허물이 아닌 기쁨을 전하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신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복음에 나오지 않는다. E. Tolle는 답변을 시도하는데, 남의 눈의 티는 보면서 자신의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까닭을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할 때, 나 자신이 더 크고 우월한 존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지난 주일에 원수를 사랑하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ego라고 불리는 작은 나, 이기적인 나에서 하느님 모습을 닮은 큰 나, 하느님 자녀로서의 존엄한 나로 전환이 필요함을 돌아보았다. 그 성찰에 오늘 말씀을 비추어보면,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며 남의 눈의 티를 탓하는 주체는 이기적이고 왜소한 자아인 에고다. 이기적인 자아인 에고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겨난다. 약육강식의 세상은 살아남기 위해 상대방을 이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찾아내 비난하고 혐오하게 된다. 그 결과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위선자라고 하시며 이렇게 이르신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논리에 따라 상대방을 이겨야 할 적으로 여기며 비판하는 태도에는, 자신은 타인과 같은 결점을 지니지 않았다는 착각이 감춰져 있다. 이기적 자아에 따라 살면 자신은 타인과 다르고, 타인보다 훌륭하다는 착각을 계속한다. 그러한 환상은 자신과 타인의 본래 모습인 하느님 자녀로서의 존엄성을 잃어버리게 한다. 그 결과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채, 타인에 차별하고 혐오하며 비판에 열을 올리게 된다. 이 어두운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먼저 자신의 모습을 깨달아야 한다. 이를 위해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 예수님은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라는 예를 드시며,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라고 이르신다. 마음(내부, 나무)에서 말과 행동(외부, 열매)이 나오기에, 자신이든 타인이든 말과 행동(외부)을 할 때 그 원인인 마음(내부)을 살피라는 말씀이다. 마음을 살피는 일, 내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식별하는 작업은 신앙 성숙에 꼭 필요하다.

 

식별의 핵심은 어떤 감정이 마음에 일어날 때 말과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그 뿌리가 이기적인 작은 자아에 있는지, 하느님 모상인 큰 자아에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인간 성숙에도 꼭 필요한 이 식별은 교육과정에서는 마음공부 형태로 실행되기도 한다. 그 과정은 마음의 경계를 의식하고, 본래의 마음을 되찾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여기서 경계란 마음이 걸리는 것,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어떤 일로 마음이 혼란스러우면 말이나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먼저 그 경계를 의식하고, 원래 마음을 되찾는 것이 마음공부다. 과연 자신의 경계를 식별하고 마음을 챙길 수 있을까? 학교에서 마음공부를 한 초등학교 2학년 학생들 이야기다.

 

학교에서 유난히 떠들썩한 승준이는 얼마 전까지도 친구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주먹대장이었다. 그런데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고 그 마음을 살펴보는 공부를 시작한 지 2개월, 승준이의 일기다. "대희가 화장실에서 내 옷에 물을 뿌렸다. 내가 좋아하는 옷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때리고 싶었지만 안 때렸다. 대희가 모르고 한 일인지도 모른다." 때리려는 마음은 이기적 자아에 의한 충동이다. 친구가 모르고 했을 수 있다는 헤아림은 큰 나에서 나온 지혜다. 이 경계를 알아차리고, 잘못을 저지른 상대의 처지까지 헤아린 것이 마음을 식별한 결과다. 아버지와 일하며 겪은 체험을 다복이의 일기다. "산에다 밭을 만들었다. 돌이 많아 허리가 너무 아팠다. 아빠에게 집에 가자고 그랬는데도 '다 만들고 가자'고 했다. 화가 나려고 했다. '! 경계구나'하니까 화를 안 낼 수 있었다. 왜 그랬을까? 아하! 아빠가 한꺼번에 일을 끝내려고 그랬구나!" 이렇게 아이들은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던 태도에서 벗어나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내가 드러내는 말이나 행동, 즉 열매는 나무에 해당하는 마음의 상태에서 나온다. 남의 눈의 티끌을 시비하기 앞서 제 눈의 들보를 보듯, 남의 말 하기 전에 내 마음부터 살펴보자. 거기서 혼란스러운 마음에 이기적이고 왜소한 자아가 꿈틀거린다면 어서 내려놓고, 하느님 모상인 큰 나를 되찾으라고 주님은 우리를 초대하신다.

 

생존을 위한다는 구실로 이기적이고 왜소한 ego에 매달려, 그저 이기기 위해 산다면 세상은 투쟁과 원망, 분노와 공포, 차별과 혐오로 가득한 마귀의 운동장이 될 것이다. 혼란스럽고 이기적 자아를 내려놓고, 하느님을 닮은 사랑과 자비의 큰 나(the Self),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제 모습을 찾을 때, 삶은 서로 이해하고 감사하며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기쁨의 잔치가 될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1코린 15, 58: 2독서)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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